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⑳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 (6편, 마지막회)

5편에서, 거북선은 "좌돌격귀선장 이언량"이라는 이름으로 1593년 2월 웅포에서 마지막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뒤로 세 가지가 겹쳤습니다. 해전 금지령, 왜성 축조, 휴전 회담. 1593년부터 1596년까지, 거북선이 나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1597년, 거북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라집니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이순신 장군이 의금부에서 풀려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그 때, 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왜군의 기습에 거의 전멸에 가까운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거북선 다섯 척도 이때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9월 16일 명량대첩입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에게 남은 배는 판옥선 열세 척뿐이었습니다. 거북선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고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도 없이 고작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왜군을 무찌릅니다. 명량 이후 조선 수군은 연이어 대규모 승리를 거둡니다. 절이도(1598년 7월), 노량(1598년 11월)까지. 모두 거북선 없이 치른 전투였습니다. 저는 명량대첩 이후에 주목했습니다. 거북선이 그렇게 전투에 강했다면 명량대첩 이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대첩까지 왜 거북선은 건조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저는 몇 가지 가설을 세우고 하나씩 검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가설 — 시간이 부족했다 명량 이후 절이도해전까지 8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8개월이면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거북선이 꼭 필요했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을 시간입니다.그러나 이 기간 동안 거북선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절이도해전 이후 노량대첩까지 또 4개월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거북선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했다는 가설은 답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가설 — 왜군이 함포를 갖췄다 거북선의 강점은 조총과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군이 함포를 갖췄다면 그 강점이 무의미해졌을 수 있습니다. 확인...

⑲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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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까지, 거북선은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부터 9월 1일 부산포대첩까지, 3개월 동안 이순신 장군의 2차·3차·4차 출동을 함께했습니다. 당포와 당항포, 한산도에서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산포대첩을 끝으로, 거북선의 활약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뜻밖의 기록, 웅포해전 그런데 이충무공전서를 이번에 다시 뒤지다가, 뜻밖의 기록을 찾았습니다. 1593년 2월 18일, 웅천 앞바다. 장계 '수륙의 여러 장수로 하여금 곧장 웅천을 치게 한 장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좌돌격귀선장 주부 이언량 등이, 궁지에 몰린 적선 세 척을 뒤쫓았다." 부산포에서 "귀선돌격장"으로 이름을 올렸던 그 이언량입니다. 부산포 이후에도,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귀선장이라는 자리가 편제에 남아 있었고, 실제로 적선을 뒤쫓는 데 나섰습니다. 비록 1593년 2월 웅포해전에도 거북선이 참전하여 활약한 기록이 발견된 것이지만 그 활약상은 1592년의 그것과 비할바가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선이 마지막으로 참전한 해전은 제가 예전에 알고 있던 부산포대첩이 아니라 웅포해전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거북선의 첫 전투는 사천해전이었고 마지막 전투는 웅포해전이었습니다. (참고로, 웅포해전은 오늘날 불려지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나 이충무공전서 원문에는 웅천으로 나온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그런데 웅포해전 이후로, 거북선의 모습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한산도대첩 이후, 해전 금지령 왜군이 한산도대첩에서 참패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에게 조선 수군과 정면으로 맞붙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해전 금지령이었습니다. 부산포에서 왜적은 이미 이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배는 항구에 그대로 두었지만,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총과 화살로 응전했습니다. 그래도 470여 척이나 되는 적선이 눈앞에 있었기에, 조선 수군은 적선 100여 척을 침몰시킬 수 있었습니다. 웅포해전에서도 적은 깊은 포구에 왜선을 숨...

⑱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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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이순신 장군 4차 출동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4차 출동에서 적의 본진을 공격하는 ‘부산포해전’을 치룹니다. 이순신 장군 4차 출동 – 장계 '부산파왜병장'의 기록 1592년 8월 1일,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의 함대가 모여 4차 출동에 대한 함대 편성을 갖추고, 전략을 논의했습니다. 출동할 전선은 74척, 협선 92척이었습니다. 이날 경상우도 순찰사와 수륙합공을 약속하였습니다. 수군은 바다에서, 육군은 뭍에서, 함께 부산의 적을 치기로 한 것입니다. 8월 1일부터 8월 23일까지 조선 수군은 출동 준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4차 출동일은 8월 24일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8월 24일 사량 앞바다에 이르렀습니다. 25일에는 당포 앞바다로 옮겨 밤을 지냈는데, 이때 경상우수사 원균과 조방장 정걸이 합류하였습니다. 26일에는 비바람이 크게 일어 배를 띄우지 못하고 거제도에 머물렀습니다. 27일 웅천 땅으로 이동하였고, 28일에는 천성 앞 정박지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29일, 새벽닭이 울 때 배를 출발했습니다. 양산 쪽에서 나온 작은 배 한 척을 만나, 동래 땅 장림포 앞바다에서 부딪쳐 불태우고 목 한 급을 베었습니다. 곧장 몰운대를 지나갔습니다. 9월 1일, 다시 새벽닭이 울 때 배를 출발했습니다. 이순신 장군 4차 출동 전투 장소 화준구미에서 왜대선 다섯 척을 만나 불태워 없앴습니다. 다대포에서 왜대선 한 척을 발견, 접전 없이 불태웠습니다. 서평포에서도 왜대선을 만나 불태웠습니다. 절영도에 이르니 왜대선 두 척이 언덕에 붙어 정박해 있었으나 적의 자취가 없어, 배에 실려 있던 물건과 무기를 찾아내지 못하게 모두 불태웠습니다. 절영도를 지나 바라보니, 몰운대 밖 큰 바다에 배 대여섯 척이 선봉으로 부산 쪽에서 나와 우리 배를 보고는 두려워 배를 돌려 몰운대로 들어갔습니다. 부산포 안, 산기슭 아래 동서로 뻗은 언덕에 왜선이 대략 470여 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선봉의 우리 배 대여섯 척이 곧장 그 앞으로 ...

⑰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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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이순신 장군 3차 출동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3차 출동에서 여러분이 잘 아는 ‘한산도대첩’과 ‘안골포해전’을 치룹니다. 이순신 장군 3차 출동 – 장계 '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 한산도대첩 7월 7일 저녁, 고성 땅 당포. 함대가 나무하고 물을 긷고 있을 때, 산으로 피란해 있던 목동 김천손이 급히 달려왔습니다. 왜적의 배 일흔여 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곧바로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함대는 견내량으로 향했습니다. 대선 서른여섯 척, 중선 스물네 척, 소선 열세 척, 모두 일흔세 척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았습니다. 판옥선끼리 부딪칠 위험이 있어 싸우기 곤란한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적이 형세가 불리해지면 곧장 뭍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다른 곳을 골랐습니다. 한산도 앞바다입니다.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뭍으로 올라가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학익진 진법 교본 (우수영전진도첩) 이순신 장군은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기 위해 판옥선 몇 척으로 싸움을 걸고 도망치는 상황을 연출하였습니다. 이에, 적선들이 일제히 돛을 올려 쫓아 나오자, 조선 수군은 거짓으로 한산도 앞바다까지 도망쳐 나왔습니다. 왜적은 그대로 따라왔습니다. 거북선의 활약 견내량에서 적이 한산도 앞 바다로 돌진해 나올 때 조선 수군은 갑자기 적 함선들을 향해 방향을 돌립니다. 그 유명한 학익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방향을 돌리고 학익진을 펴는 동안 달려드는 적을 막아 학익진이 완성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거북선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북선은 시간만 벌어준 것이 아니라 돌격해오는 적의 앞부분을 부수면서 적의 진행을 막고 앞장 선 적과 뒤따라오는 적의 간격을 좁혀 판옥선의 대포가 적선에 쉽게 명중될 수 있도록 탄착점을 만들어 주었을 것입니다. 적은 앞에 갑자기 나타난 거북선에 혼비백...

⑯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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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거북선이 이순신 장군 1차 출동(옥포·합포·적진포)에는 없었다는 것과, 그 이유로 짐작되는 촉박한 준비 시간을 살펴봤습니다. 드디어 1592년 5월 29일,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 2차 출동에서 첫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순신 장군 2차 출동 – 장계 '당포파왜병장'의 기록 사천해전, 거북선의 첫 등장 5월 29일 이순신 장군은 전선 스물세 척을 거느리고 출동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선 세 척을 이끌고 합류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사천으로 향했습니다. 사천에 이르니, 왜적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아래 매어 두고 있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결과를 보고한 장계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화살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적선을 불태우려 해도 조수가 이미 물러가 판옥대선이 쉽게 곧장 부딪쳐 들어갈 수 없었으며, 게다가 저들은 높고 우리는 낮아 지세가 불리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약 거짓으로 물러가면 저들은 반드시 배를 타고 나와 우리와 싸우려 할 것이니, 우리가 마땅히 중류로 끌어내어 합공하면 이는 매우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배를 돌려 채 1리도 못 갔을 때, 왜적 이백여 명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일부는 배에 올라타고, 나머지는 언덕에 남아 포를 쏘며 날뛰었습니다. 그사이 밀물이 들어오면서, 점차 배를 띄울 만큼 물이 차올랐습니다. "신이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물이 차오른 바로 그때, 장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순신 2차 출동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거북선 "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의 침입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곧장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돌격장이 이 배를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

⑮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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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거북선에 대해 오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북선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었다면, 왜 7년 전쟁 중 임진년 한 해에만 그것도 사천해전에서 부산포해전까지 단지 3개월만 싸웠을까요? 제 지식의 한도 내에서 거북선은 사천, 당포, 당항포, 한산도,부산포에서 싸웠을 뿐, 그 후의 기록은 보지 못하였고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제 지식이 잘못 되었거나 아니면 거북선에 대해서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것이 분명하였기에, 저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관련 기록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이충무공전서를 참고로 하였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이순신 장군 1차 출동 – 장계 '옥포파왜병장'의 기록 1592년 5월 7일부터 8일,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첫 출동을 합니다. 그리고 옥포·합포·적진포, 세 곳에서 승리를 합니다. 승리 후, 조정에 싸움에 대한 내용을 '옥포파왜병장'이라는 장계로 보고를 합니다. 《이충무공전서》 옥포파왜병장을 읽어보면, 여러 장수의 개별 전공이 낱낱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누가 어느 배를 부수고 누구의 목을 베었는지, 이름과 숫자가 촘촘합니다. 그런데 이 장계 안에 "거북선"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거북선은 왜 첫 출동에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거북선은 1차 출동시 완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8일에는 "거북선에 쓸 돛베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4월 13일 하루 전, 4월 12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배를 타고 거북함의 지자·현자포를 쏘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하루 전까지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발발 사실이 이순신 장군에게 알려진 것은 이틀 후 4월 15일입니다. 4월 15일부터 첫 출정을 한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