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③ (백의종군로) 옛집을 떠나 공주까지

장군은 어머니의 빈소를 차리고 사흘을 더 옛집에 머물렀습니다. 금부의 서리가 공주에서 와서 어서 가자고 다그쳤습니다. 장례를 치를 시간은 없었습니다. 이번 글은 여드레째와 아흐레째입니다. 아산 옛집을 떠나 금곡과 보산원을 지나 공주 일신역까지 갑니다. 장군이 말을 타고 하루에 간 길을 우리는 이틀에 걷습니다. 👉 ② (백의종군로) 옛집에서 게바위까지 먼저 알아 둘 것 셋째 글의 일정 날 구간 거리 날짜 (음력 → 양력) 묵는 곳 8 아산 옛집(현충사) → 곡교천 → 금곡 → 보산원 약 24km 4.19 → 6.3 천안 광덕면 보산원 부근 9 보산원 → 공주 일신역 약 29km 4.19 → 6.3 공주 (장군이 잔 곳) 거리는 추정입니다. 이 구간은 공식으로 안내하는 걷는 길의 거리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걸으면서 고치겠습니다. 8일째 — 옛집에서 보산원까지 (약 24km) 장군의 날: 음력 4월 19일(양력 6월 3일)의 앞부분 영전에 하직하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9일) 난중일기에서 가장 아픈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문장을 안고 현충사를 나섭니다. 통곡의 길 아산시는 이날 장군이 떠난 길을 '통곡(痛哭)의 길'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현충사 고택에서 곡교천을 건너 감타기마을(금곡)을 지나 넙티고개에 이르는 길입니다(한국일보, 2015). 넙티고개를 넘으면 천안 땅입니다. 금곡, 말에서 내려 곡하다 "금곡(연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선전의 집앞에 이르니 강정(姜晶) ∙ 강영수(姜永壽)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9일) 금곡의 자리는 두 가지로 봅니다. 번역본 주석은 광덕면 대덕리로 적었습니다. 아산시와 순...

㊲ 이순신 장군의 어머님에 대하여

장군이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다는 것은 많은 분이 압니다. 『난중일기』에 어머니가 100번이 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장군을 어떻게 키웠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남은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쓴 글은 전하지 않습니다. 장군의 어린 시절을 적은 기록도 몇 줄뿐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남아 있는 조각들을 모아 보려고 합니다. 「행록」 몇 줄과 일기 몇 줄입니다. 그 조각들 속에서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그리고 그 어머니가 키운 아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순신'이라는 이름 장군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입니다. 장군은 1545년 한양 건천동에서 네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형은 희신과 요신, 아우는 우신입니다. 「행록」은 장군이 태어날 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공이 처음 태어날 때 어머니의 꿈에 공의 할아버지인 참판공[이백록]께서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 하라'고 하였으므로, 어머니가 덕연군[공의 아버지 이정]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여 마침내 그대로 이름을 지었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순신'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꿈에서 왔습니다. 어머니가 꿈을 이야기했고, 아버지가 그대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네 아들의 이름은 옛 성인 복희, 요, 순, 우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흔히 말합니다. 아들들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 부모의 마음이 이름에 담겨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군은 어린 시절을 한양에서 보내고, 청소년기에 외가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 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군이 자란 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습니다. 부모 잃은 손자들을 품은 어머니 장군의 두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은 조카들은 어렸습니다. 「행록」은 그 아이들이 누구 손에서 자랐는지 적어 두었습니다. "공의 두 형이 일찍 죽고 그 자녀들이 모두 어렸으므로 공...

㊱ 이순신 장군의 시와 음악

저는 시를 좋아합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합니다. 『난중일기』를 주제별로 다시 읽다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장군의 일기 속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피리 소리를 들었고, 거문고를 타게 했고, 새로 만든 가야금에 줄을 매었습니다. 잠 못 드는 밤에는 시를 읊었고, 비 오는 날에는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무패의 장군을 압니다. 이번 글에서는 시를 읊고 피리 소리를 듣는 장군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의 피리 소리 제가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시조 한 수였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이 시조를 다시 읽다가 마지막 구절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일성호가'는 한 가락의 피리 소리입니다. 호가(胡笳)는 피리의 한 종류입니다. 장군의 시름을 끊어 놓은 것은 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피리 소리였습니다. 장군의 가장 유명한 시조는 피리 소리로 끝납니다. 👉 ① 우리가 몰랐던 '한산도가'의 진짜 배경 진중에 울린 소리 『난중일기』에는 그 피리 소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조카가 분 피리 1594년 여름, 한산도 진중의 밤입니다. "밤이 깊은데 피리소리 가득한 바다, 거문고를 타며 장수를 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난중일기 1594년 6월 9일) 이틀 뒤에도 적었습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앉아서 오래도록 있다가 헤어졌다." (난중일기 1594년 6월 11일) 그해 8월에는 피리를 분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없어 잔잔하여 해(荄)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다. 밤이 깊어서야 그만 뒀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13일) 해(荄)는 장군의 조카 이해입니다. 일기에는 "...

㉟ 목을 베는 마음과 옷을 벗어 주는 마음

1596년 가을,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전라도를 돌아보는 길에 있었습니다. 고을마다 들러 일을 살피는 순시였습니다. 9월 13일, 장군은 무장(지금의 고창)에서 이중익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중익은 자기의 곤궁하고 급한 사정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장군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난중일기 병신년 9월 13일) 그로부터 일주일 뒤의 일기입니다. "아침에 각가지 사무보는 색리들의 죄를 논란했다." (난중일기 병신년 9월 20일) 이틀 뒤에도 "각가지의 죄를 논란했다"고 적었습니다. 사흘 뒤에는 "색리 및 선중립의 죄를 논란했다"고 적었습니다. (병신년 9월 22일, 9월 25일) 열흘 남짓 사이에 옷을 벗어 주고 죄를 벌하는 장면이 난중일기에 나옵니다. 110여 번의 죄 다스림 『난중일기』에는 장군이 죄를 다스린 기록이 많습니다. 『난중일기』를 주제별로 모아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110여 회에 이릅니다. 처형도 있고, 곤장도 있습니다. 첫 기록은 전쟁이 나기 석 달 전입니다.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고 열한 달이 지났을 때입니다. "방답의 병선을 맡은 군관들과 색리들이 그들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난중일기 임진년 1월 16일) 장군은 무엇을 벌했을까요. 기록을 모아 보니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맡은 일을 하지 않은 자 배를 고치지 않은 군관, 무기를 망가진 채 둔 색리, 정한 날짜에 오지 않은 수령이었습니다. "하동현감에게는 두 번이나 기일에 이르지 않은 죄로 곤장 아흔 대를 때렸고" (난중일기 을미년 4월 29일) 현감은 한 고을의 수령입니다. 수령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달아난 자 달아난 군사는 목숨으로 갚았습니다. 장군이 처음 바다로 나가기 하루 전이었습니다. "이 날 여도수군 황옥천(黃玉千)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앞에 높이 매달았다." (난중일기 ...

㉞ 기록으로 살펴본 거북선의 역사

이미지
거북선 이야기는 이 블로그에서 여섯 편이나 썼습니다.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입니다. 그 연재는 거북선의 전술 운용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 ⑮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 (1편) 이번 글에서는 거북선에 대한 오래된 기록들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거북선의 이름은 1413년에 처음 나타나 188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470년이 넘습니다. 그 긴 시간을 차례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보다 180년 먼저 보이는 거북선 태종이 본 거북선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기록은 『태종실록』입니다.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2월 5일) 1413년입니다. 임진강 나루에서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싸우는 연습을 했습니다. 임금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2년 뒤에는 좌대언 탁신이 의견을 올렸습니다.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7월 16일) 적과 부딪쳐도 해를 입지 않는 배였습니다. 왜구를 막으려고 만든 돌격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거북선의 뿌리를 왜구가 가장 극성이던 고려 말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태종 때 거북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름만 남았습니다. 그 뒤 거북선은 오랫동안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1592년, 다시 바다에서 일기에 남은 준비 장군은 1591년 2월,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일기에 거북선이 나타납니다. "이 날 거북선에 쓸 돛베 스무아홉 필을 받았다." (난중일기 임진년 2월 초8일)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난중일기 임진년...

㉝ 진린이 직접 남긴 단 한 편의 글

지난여름, 이 블로그에 진린 도독 이야기를 네 편에 걸쳐 썼습니다. 오만했던 명나라 장수가 이순신 장군을 만나 마음을 바꾸고, 장군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이야기였습니다. 👉 ⑤ 이순신 장군과 진린 이야기 (1편) 그 글들에서 저는 진린의 말을 여러 번 옮겼습니다. "공은 작은 나라에 있을 인물이 아니다."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충무공전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들은 모두 조선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진린이 그렇게 말했다고, 조선 사람이 옮겨 적은 것입니다. 전서 안에서 진린이 직접 쓴 글은 한 편뿐입니다. 장군의 영전에 올린 제문입니다. 이번 글은 그 제문을 읽는 글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기록이 장군을 어떻게 적었는지도 함께 보려 합니다. 전서에 실린 진린의 제문 제문은 『이충무공전서』 권12 부록4에 있습니다. 제목은 「이 통제사를 제사 지내는 글(祭李統制文)」입니다. 『충무공가승』에는 「중조수군도독진린제문(中朝水軍都督陳璘祭文)」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충무공전서』 권12 각주)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세차 만력 27년 기해 [1599년] 정월 임오 초하루에서 10일을 넘긴 11일에 흠차총령 수병어왜총병관 전군도독부 도독첨사 진린은 삼가 돼지와 양과 맑은 술의 제물을 갖추어 조선 수군통제사 이모[이순신]의 영령 앞에 제사를 올리며 아룁니다." (진린, 「이 통제사를 제사 지내는 글」, 『이충무공전서』 권12) 1599년 정월 11일입니다. 장군이 노량에서 전사한 지 쉰 날쯤 지난 때입니다. 장군은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습니다. 아산 금성산 아래에 장사 지낸 것은 그해 2월 11일입니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제문을 읽다 바둑알처럼 작은 고을에서 "아아! 통제사는 멀리 번방의 나라에서 위난을 편안하게 하는 지혜로 피폐한 군대를 이끌고 바둑알처럼 작은 고을에서 왜적이 서쪽을 엿보는...

② (백의종군로) 옛집에서 게바위까지

지난 글에서 우리는 서울 종각을 떠나 닷새 만에 아산 옛집에 닿았습니다. 장군이 사흘에 간 길이었습니다. 👉 ① (백의종군로) 옥문을 나서 아산 옛집까지 이번 글은 엿새째와 이레째입니다. 옛집에서 바닷가 게바위까지 갔다가, 다시 옛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장군이 어머니를 맞으러 나갔다가, 어머니의 영구를 모시고 돌아온 길입니다. 옛집에서 기다린 여드레 장군은 음력 4월 5일(양력 5월 20일) 저물 무렵 옛집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4월 12일까지 이 집에 머물렀습니다. 바닷길로 올라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장군은 걷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여드레는 건너뜁니다. 다만 그 날들의 일기는 읽고 가겠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다 "멀고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오랫동안 막혔던 정을 푹 풀고 갔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6일) 장군을 데려가던 금부도사 이사빈도 아산에 와 있었습니다. 장군은 그를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4월 9일에는 동네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와 먼 길을 위로했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쬐끔도 즐겁지 않았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9일) 불길한 꿈 "새벽 꿈이 매우 번거로워 다 말할 수가 없다. …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1일) 안흥량에서 온 편지 이튿날 종 태문이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머니께 서는 숨이 곧 끊어질 듯해도 초9일에 위 ∙ 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흥량(서산시 근흥면 안흥)에 도착하였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2일) 어머니는 남쪽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고 계셨습니다. 법성포에서는 닻이 끌려 배가 떠내려가, 엿새나 일행과 떨어졌다가 다시 만났다고 했습니다. 장군은...

① (백의종군로) 옥문을 나서 아산 옛집까지

언젠가 이 길을 걸으려 합니다. 1597년 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지난 길입니다. 서울에서 합천 초계까지입니다. 아직 걷지 않았습니다. 걷기 전에 글로 먼저 길을 닦아 두려 합니다. 함께 가실 분이 있다면 이 글이 일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원칙은 두 가지로 정했습니다. 장군이 실제로 지나가거나 머문 곳만 들릅니다. 장군이 주무신 곳에서 되도록 함께 묵습니다. 일정은 30일입니다. 쉬는 날 없이 하루 평균 20km 남짓 걷습니다. 길잡이는 난중일기입니다. 장군의 친필 일기를 먼저 읽고, 친필이 없는 곳은 『이충무공전서』로 채웁니다. 날짜도 한 가지 정해 두었습니다. 난중일기의 날짜는 음력입니다. 이 연재에서는 음력 날짜 옆에 양력 날짜를 함께 적습니다. 1597년 음력을 오늘날 우리가 쓰는 양력(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한 날짜입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음양력 자료를 바탕으로 한 계산 프로그램으로 셈했습니다. 계산으로 나온 날의 간지가 일기에 적힌 간지와 모두 맞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예를 들어 장군이 옥문을 나온 음력 4월 1일은 양력 5월 16일이고, 간지는 두 쪽 모두 신유(辛酉)입니다. 👉 ㉚ 난중일기 초고본과 전서본의 차이 이번 글은 첫 닷새입니다. 서울 종각에서 아산 옛집까지입니다. 장군은 말을 타고 사흘에 간 길입니다. 우리는 걸어서 닷새에 갑니다. 떠나기 전 이틀 4월 1일(양력 5월 16일), 옥문을 나오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 ∙ 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 ∙ 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초1일) 그날 많은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은 술병을 통째로 들고 왔습니다. 류성룡은 종을 보냈습니다. 판부사 정탁도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습니다. 장군은 권하는 술을 사양하지 못해 몹시 취했습니다. 👉 ⑥ 이순신 장군과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 장군 ...

㉜ 마지막 두 달의 일기, 말을 아낀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의 마지막 해, 1598년 무술년 일기는 아주 짧습니다. 1월 4일 다음이 곧바로 9월 15일입니다. 그사이 여덟 달 남짓은 친필 일기도, 전서본도 전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두 달 남짓입니다. 그 두 달도 한 벌이 아닙니다. 장군이 직접 쓴 친필 일기는 10월 7일에서 끝납니다.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일기는 11월 17일까지 이어집니다. 노량해전 이틀 전입니다. 그 사이 10월 13일부터 11월 7일까지는 전서본에도 빠져 있습니다. 두 개의 마지막 날 친필 일기의 마지막 — 10월 7일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이 군량 넷 ∙ 조 하나 ∙ 기름 다섯 되 ∙ 꿀 석되를 바쳤다. 김태정(金太丁)은 쌀 두 섬 한 말을 바쳤다." (난중일기 무술년 10월 초7일) 장군이 붓으로 쓴 마지막 문장은 백성이 바친 쌀과 꿀의 기록입니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의 각주를 보면, 이 문장은 전서에는 빠져 있고 친필에만 있습니다. 전서본의 마지막 — 11월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당진포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로부터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더니, 왜적은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 달아났고 잡은 왜선 및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이충무공전서』 권8, 무술년 11월 17일) 적의 군량선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배와 쌀은 명나라 군사가 가져갔습니다. 장수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장군은 그 일을 적고, 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두 판본 모두 쌀 이야기로 끝납니다. 하나는 백성이 바친 쌀이고, 하나는 빼앗긴 쌀입니다. 날카롭게 쓰던 사람 지난 글 「난중일기 초고본과 전서본」에서 장군의 날카로운 문장을 옮긴 적이 있습니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허튼소리가 많으니 가소롭다." (난중일기 계사년 5월 26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음흉하고 간사한 말을 많이 내뱉으니 몹시도 해괴하...

㉛ 군사와 백성을 먹여 살리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승전 보고는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대부분은 쌀 이야기였습니다. 격군(노 젓는 군사)이 모자란다는 이야기, 병든 군사 이야기, 피란민 이야기였습니다. 몇 섬, 몇 명, 몇 척. 숫자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축구로 치면 이렇습니다. 수비하는 선수가 있고, 어시스트하는 선수가 있고, 골을 넣는 선수가 있습니다. 장군은 셋 다 했습니다. 바다에서 적을 깨뜨렸고, 호남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수만 명의 밥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글은 싸움이 아니라 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 다섯 홉 1594년 3월, 장군은 조정에 이런 계산서를 올렸습니다. "좌·우도의 전선 중에서 먼저 모인 것이 110척이며, 사후선이 110척으로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 무려 17,000여 명으로서 한 사람마다 아침저녁으로 각각 5홉씩을 나누어 준다고 하면, 하루 먹는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을 밑돌지 않으며, 한 달이면 나누어 주는 것이 3,400여 석입니다." (『이충무공전서』 권4, 「군량을 조처해 주시기를 청하는 계본」)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남은 군량으로는 "겨우 5월 15일경까지 이어 갈 형편입니다." 두 달 뒤면 쌀이 떨어진다는 보고입니다. 적과 마주한 장수가 쓴 글입니다. 그 전해 사정은 더 나빴습니다. 1593년 8월의 장계입니다. "겨우 남아 있는 군졸들도 조석으로 먹는 것이 불과 2~3홉으로 배고프고 고달픔이 극도에 달하여 활을 당기고 노를 젓기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충무공전서』 권3, 「왜군의 정세를 아뢰는 계본」) 같은 장계에 따르면, 장군이 거느린 군사 6,200여 명 가운데 싸우다 죽거나 병으로 죽은 자가 600여 명이었습니다. 1594년 1월부터 4월까지 삼도 수군의 사망자는 1,704명, 앓아누운 자는 3,759명이었습니다. (『이충무공전서』 권4, 「방비군을 결석시킨 여러 장수의 처벌을 청하는 계본」) 적보다 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