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백의종군로) 옛집에서 게바위까지
지난 글에서 우리는 서울 종각을 떠나 닷새 만에 아산 옛집에 닿았습니다. 장군이 사흘에 간 길이었습니다.
이번 글은 엿새째와 이레째입니다. 옛집에서 바닷가 게바위까지 갔다가, 다시 옛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장군이 어머니를 맞으러 나갔다가, 어머니의 영구를 모시고 돌아온 길입니다.
옛집에서 기다린 여드레
장군은 음력 4월 5일(양력 5월 20일) 저물 무렵 옛집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4월 12일까지 이 집에 머물렀습니다. 바닷길로 올라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장군은 걷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여드레는 건너뜁니다. 다만 그 날들의 일기는 읽고 가겠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다
"멀고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오랫동안 막혔던 정을 푹 풀고 갔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6일)
장군을 데려가던 금부도사 이사빈도 아산에 와 있었습니다. 장군은 그를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4월 9일에는 동네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와 먼 길을 위로했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쬐끔도 즐겁지 않았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9일)
불길한 꿈
"새벽 꿈이 매우 번거로워 다 말할 수가 없다. …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1일)
안흥량에서 온 편지
이튿날 종 태문이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머니께 서는 숨이 곧 끊어질 듯해도 초9일에 위 ∙ 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흥량(서산시 근흥면 안흥)에 도착하였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2일)
어머니는 남쪽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고 계셨습니다. 법성포에서는 닻이 끌려 배가 떠내려가, 엿새나 일행과 떨어졌다가 다시 만났다고 했습니다. 장군은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입니다. 3년 전 정월, 여수에서 아들을 떠나보내며 하신 말씀이 일기에 남아 있습니다.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 (난중일기 갑오년 1월 12일)
먼저 알아 둘 것
둘째 글의 일정
| 날 | 구간 | 거리 | 날짜 (음력 → 양력) | 묵는 곳 |
|---|---|---|---|---|
| 6 | 아산 옛집(현충사) → 중방포 → 게바위 | 약 15km | 4.13 → 5.28 | 인주 게바위 부근 |
| 7 | 게바위 → 중방포 → 아산 옛집(현충사) | 약 15km | 4.16 → 5.31 | 현충사 부근 (빈소를 차린 곳) |
거리는 아산시가 만든 백의종군길 2구간 '효(孝)의 길'을 따랐습니다. 현충사에서 인주면 해암리 게바위까지 15km입니다(서울신문, 2021). 이 길은 중방포와 고분다리를 지납니다. 가는 날과 오는 날 같은 길을 걷습니다.
두 날 사이에는 사흘이 비어 있습니다. 장군은 4월 13일에 게바위로 가서, 16일에 영구를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쉬는 날 없이 걷기로 했으니, 엿새째에 가고 이레째에 돌아옵니다.
6일째 — 옛집에서 게바위까지 (약 15km)
장군의 날: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8일)
어머니를 맞으러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蔚)이 종 애수(愛壽)를 보내면서 / "아직 배오는 소식이 없다." / 고 하였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3일)
장군은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의 집에 들렀습니다. 아직 배가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장군은 홍찰방과 헤어져 변흥백의 집으로 갔습니다. 변흥백은 성이 어머니와 같은 변씨입니다. 어떤 사이였는지는 일기에 없습니다.
홍찰방의 집과 변흥백의 집이 어디였는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효의 길'을 따라 바닷가로 갑니다.
하늘이 캄캄했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3일)
"곧 갯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대강 적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3일)
"뒷날에 대강 적다." 이날의 일기는 그날 쓰지 못했습니다.
게바위
게바위는 지금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에 있습니다. 번역본 괄호 안의 "염치읍"은 지금 행정구역과 다릅니다. 한자로는 해암(蟹巖), '게 바위'라는 뜻입니다.
2024년 4월, 이곳에 장군의 글씨를 모은 비석 두 기가 섰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에 "대설국욕(大雪國辱)"이 새겨졌습니다(충청타임즈, 2024). 3년 전 어머니가 하신 말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입니다.
게바위에서 보낸 사흘
"홍찰방 ∙ 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했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4일)
"저녁나절에 입관했다. 오종수(吳終壽)가 점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로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5일)
관을 짜고, 어머니를 관에 모시는 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천안군수가 와서 일을 도왔고, 전경복이 날마다 상복 만드는 일을 돌봐 주었습니다.
장군이 이 사흘 밤을 어디서 잤는지는 일기에 없습니다. 영구가 있던 배 가까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엿새째 밤을 게바위 가까운 인주에서 묵습니다.
7일째 — 게바위에서 옛집까지 (약 15km)
장군의 날: 음력 4월 16일(양력 5월 31일)
영구를 모시고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6일)
장군은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긴 뒤, 영구를 상여에 옮겨 실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옛집까지 상여를 따라 걸었을 것입니다. 중방포의 정확한 자리는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시의 '효의 길'이 중방포를 지나니, 이 길을 따라 돌아옵니다.
이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6일)
빈소를 차린 옛집
이레째 밤은 다시 현충사 가까이에서 묵습니다. 장군이 어머니의 빈소를 차린 옛집 곁입니다.
다음 일정
장군에게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李秀榮)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친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7일)
이튿날은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장군은 몸이 몹시 불편해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의 집으로 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음력 4월 19일(양력 6월 3일), 장군은 어머니의 빈소를 두고 남쪽으로 떠납니다. 다음 글은 그 길입니다. 옛집을 떠나 보산원을 지나 공주까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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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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