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백의종군로) 옥문을 나서 아산 옛집까지
언젠가 이 길을 걸으려 합니다.
1597년 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지난 길입니다.
서울에서 합천 초계까지입니다.
아직 걷지 않았습니다.
걷기 전에 글로 먼저 길을 닦아 두려 합니다.
함께 가실 분이 있다면 이 글이 일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원칙은 두 가지로 정했습니다.
- 장군이 실제로 지나가거나 머문 곳만 들릅니다.
- 장군이 주무신 곳에서 되도록 함께 묵습니다.
일정은 30일입니다. 쉬는 날 없이 하루 평균 20km 남짓 걷습니다. 길잡이는 난중일기입니다. 장군의 친필 일기를 먼저 읽고, 친필이 없는 곳은 『이충무공전서』로 채웁니다.
날짜도 한 가지 정해 두었습니다. 난중일기의 날짜는 음력입니다. 이 연재에서는 음력 날짜 옆에 양력 날짜를 함께 적습니다. 1597년 음력을 오늘날 우리가 쓰는 양력(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한 날짜입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음양력 자료를 바탕으로 한 계산 프로그램으로 셈했습니다. 계산으로 나온 날의 간지가 일기에 적힌 간지와 모두 맞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예를 들어 장군이 옥문을 나온 음력 4월 1일은 양력 5월 16일이고, 간지는 두 쪽 모두 신유(辛酉)입니다.
이번 글은 첫 닷새입니다. 서울 종각에서 아산 옛집까지입니다. 장군은 말을 타고 사흘에 간 길입니다. 우리는 걸어서 닷새에 갑니다.
떠나기 전 이틀
4월 1일(양력 5월 16일), 옥문을 나오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 ∙ 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 ∙ 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초1일)
그날 많은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은 술병을 통째로 들고 왔습니다. 류성룡은 종을 보냈습니다. 판부사 정탁도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습니다. 장군은 권하는 술을 사양하지 못해 몹시 취했습니다.
👉 ⑥ 이순신 장군과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 장군
👉 ⑱ 조정에서 장군을 지킨 사람, 정탁
4월 2일(양력 5월 17일), 류성룡과 밤 깊도록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과 밤 깊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져 나왔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2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이 짧은 한 줄이 두 사람 사이의 전부를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장군은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먼저 알아 둘 것
걷기 좋은 때
장군이 서울을 떠난 음력 4월 3일은 양력으로 5월 18일입니다. 아산 옛집에 닿은 음력 4월 5일은 양력 5월 20일입니다. 5월 중순에 떠나면 장군과 같은 계절에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덥기 전이라 걷기에도 좋습니다.
첫 닷새의 일정
| 날 | 구간 | 거리 | 날짜 (음력 → 양력) | 묵는 곳 |
|---|---|---|---|---|
| 1 | 서울 종각 → 숭례문 → 남태령 → 과천 → 인덕원 | 약 22km | 4.3 → 5.18 | 인덕원 부근 |
| 2 | 인덕원 → 옛 수원 읍치(화성 안녕동) | 약 24km | 4.3 → 5.18 | 옛 수원 (장군이 잔 곳) |
| 3 | 옛 수원 → 독산성 아래 → 오산 | 약 12km | 4.4 → 5.19 | 오산 |
| 4 | 오산 → 수탄 → 평택현(팽성읍 객사리) | 약 22km | 4.4 → 5.19 | 평택현 (장군이 잔 곳) |
| 5 | 평택현 → 운선교 → 선산 → 아산 옛집(현충사) | 약 26km | 4.5 → 5.20 | 현충사 부근 (장군이 잔 곳) |
합계 약 106km입니다.
거리는 추정입니다. 기준으로 삼은 숫자는 두 가지입니다. 해군의 위탁을 받은 이순신연구소는 의금부에서 평택 운선교까지를 82.1km로 고증했습니다(이투데이, 2015). 아산시는 운선교에서 현충사까지 '이순신백의종군길'을 22.9km로 안내합니다. 날마다 나눈 거리는 제가 어림한 것입니다. 걸으면서 고치겠습니다.
1일째 — 종각에서 인덕원까지 (약 22km)
장군의 날: 음력 4월 3일(양력 5월 18일)의 앞부분
옥문이 있던 자리
출발은 종각역 1번 출구 앞입니다. 조선의 의금부가 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서울시는 이곳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안내판을 세워 두었습니다.
여기서 숭례문까지 걷습니다. 장군이 옥문을 나와 이틀을 머문 곳이 "남문 밖"이었습니다. 우리도 숭례문을 지나 남쪽으로 나갑니다.
한강과 남태령
장군이 어디서 한강을 건넜는지는 일기에 없습니다. 조선의 큰길인 삼남대로는 동작나루에서 강을 건너 남태령을 넘었습니다. 서울시 안내도 남태령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로 적었습니다. 장군이 인덕원을 지났으니 이 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추정입니다.
우리는 동작대교를 걸어서 건넙니다. 사당을 지나 남태령을 넘고, 과천을 지나 인덕원에 닿습니다.
인덕원, 혼자 누워 쉰 곳
"금오랑 이사빈(李士贇) ∙ 서리 이수영(李壽永) ∙ 나장 한언향(韓彦香)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의왕시 인덕원)에서 말을 쉬게 하고 조용히 누워서 쉬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3일)
장군을 데려가던 의금부 사람들은 먼저 수원으로 갔습니다. 장군은 인덕원에서 혼자 누웠습니다. 옥에서 나온 지 사흘째였습니다.
첫날은 여기서 멈춥니다. 장군은 이날 수원까지 갔지만, 우리는 걸어서 가니 하루를 둘로 나눕니다.
2일째 — 인덕원에서 옛 수원까지 (약 24km)
장군의 날: 음력 4월 3일(양력 5월 18일)의 뒷부분
일기 속 수원은 지금의 수원이 아닙니다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서, 경기체찰사의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병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집에서 잤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3일)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야 합니다. 장군이 잔 수원은 지금의 수원 화성이 아닙니다.
1597년의 수원부 관아는 화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 융릉과 건릉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조가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고을을 팔달산 아래로 옮겼습니다. 그 새 고을에 쌓은 성이 화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원 화성을 지나 더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둘째 날 밤은 융건릉 부근에서 묵습니다. 장군이 잔 병졸의 집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옛 고을 안 어디쯤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신복룡이 술을 들고 와 장군을 위로했습니다. 순천부사 류영건도 찾아왔습니다.
3일째 — 옛 수원에서 오산까지 (약 12km)
장군의 날: 음력 4월 4일(양력 5월 19일)의 앞부분
독산성 아래
"일찍 길을 떠나, 독성(수원시 태안읍 양산리) 아래에 이르니, 반자(判刺) 조발(趙撥)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4일)
독성은 독산성입니다. 지금 오산시에 있는 산성입니다. 괄호 안의 지명은 번역본의 옛 주석이라 지금 행정구역과 다릅니다.
임진년 겨울, 권율이 이 성에 진을 치고 적을 막았습니다. 장군이 지금 찾아가는 도원수가 바로 그 권율입니다. 장군은 성 "아래"를 지났다고 적었습니다. 성에 오르는 것은 우리가 덧붙이는 일입니다.
조발은 길가에 막을 치고 술을 차려 두었습니다. 죄인이 되어 내려가는 사람을 그렇게 맞았습니다.
진위로 가는 옛길, 그리고 오산
"취하도록 마시고 길을 떠나 바로 진위구로(평택군 진위 면 봉남리)를 거쳐 냇가에서 말을 쉬게 했다. / 오산에 이르러 황천상(黃天祥)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4일)
'진위구로(振威舊路)'는 진위로 가는 옛길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일기의 순서로 보면 냇가에서 말을 쉰 곳은 독산성과 오산 사이입니다.
황천상은 장군의 짐이 무겁다며 말을 내어 실어 보냈습니다. 장군은 "고마울 뿐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셋째 날은 짧게 끝냅니다. 오산에서 묵습니다. 독산성에 오르내리고, 이틀 동안 쌓인 발의 피로를 푸는 날로 삼습니다.
4일째 — 오산에서 평택현까지 (약 22km)
장군의 날: 음력 4월 4일(양력 5월 19일)의 뒷부분
수탄을 건너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내은손(李內隱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주인이라는 사람이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자는 방이 몹시 좁은데 따뜻하게 불까지 때어 땀이 흘렀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4일)
수탄(水灘)은 이름 그대로 물을 건너는 여울입니다. 정확한 자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평택현의 옛 자리
그때의 평택현은 지금의 평택 시내가 아닙니다. 옛 관아는 팽성읍 객사리에 있었습니다. 지금 팽성읍 행정복지센터 일대가 동헌 자리로 파악되어, 평택시가 2021년에 관아터 현판을 달았습니다. 관아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졌습니다. 객사와 향교만 남아 있습니다(경기일보, 2023).
이내은손의 집이 어디였는지는 모릅니다. 좁은 방에 불을 따뜻하게 때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옛 고을 가까이에서 묵습니다.
5일째 — 평택현에서 아산 옛집까지 (약 26km)
장군의 날: 음력 4월 5일(양력 5월 20일)
해가 뜨자 선산으로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이르렀다. 나무들은 두번이나 들불이 나서 불에 탄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무덤 아래에서 절하며 곡하는데 한참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5일)
팽성을 떠나 안성천을 건넙니다. 운선교가 평택과 아산의 경계입니다. 여기부터 충청도입니다.
아산시가 만든 '이순신백의종군길'은 운선교에서 현충사까지 22.9km입니다. 이 길은 이충무공 묘소를 지납니다. 장군의 묘소는 장군이 돌아가신 뒤에 생긴 곳입니다. 1597년의 장군이 지난 곳은 아닙니다. 들러 절을 올리는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번역본 주석은 선산을 염치읍 백암리로 적었습니다. 현충사가 있는 마을입니다. 장군은 그 무덤 아래에서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물 무렵 옛집
"저녁이 되어 내려와 외가에 와서 사당에 절했다.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곡하며 절했다.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5일)
"저물 무렵 우리집에 이르러 장인 ∙ 장모님의 신위 앞에 절하고 곧 작은 형님(堯臣)과 여필(禹臣)의 처 제수의 사당에 다녀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난중일기 정유년 4월 5일)
이날 장군은 절만 했습니다. 조상에게, 외가에, 장인과 장모에게, 먼저 간 형과 아우의 집에. 그리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만 적었습니다.
외가와 조카 뇌의 집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산에서 현충사로 곧장 갑니다.
현충사에 들르는 까닭
현충사 사당은 1706년에 세워졌습니다. 장군이 본 적 없는 건물입니다. 그래도 들르기로 했습니다. 그 안에 장군의 옛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기의 "우리집"입니다. 장인과 장모의 신위를 모신 집이었습니다.
닷새째 밤은 현충사 가까이에서 묵습니다. 장군이 잠든 옛집 곁입니다.
다음 일정
장군은 이 집에서 여드레를 머뭅니다. 바닷길로 올라오시던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8일), 장군은 어머니를 맞으러 바닷가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듣습니다. 다음 글은 그 길입니다. 옛집에서 게바위까지, 그리고 다시 옛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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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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