⑲ 거북선은 왜 3개월만 싸웠는가? (5편)

4편까지, 거북선은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부터 9월 1일 부산포대첩까지, 3개월 동안 이순신 장군의 2차·3차·4차 출동을 함께했습니다. 당포와 당항포, 한산도에서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산포대첩을 끝으로, 거북선의 활약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뜻밖의 기록, 웅포해전

그런데 이충무공전서를 이번에 다시 뒤지다가, 뜻밖의 기록을 찾았습니다.

1593년 2월 18일, 웅천 앞바다.
장계 '수륙의 여러 장수로 하여금 곧장 웅천을 치게 한 장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좌돌격귀선장 주부 이언량 등이, 궁지에 몰린 적선 세 척을 뒤쫓았다."

부산포에서 "귀선돌격장"으로 이름을 올렸던 그 이언량입니다.
부산포 이후에도,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귀선장이라는 자리가 편제에 남아 있었고, 실제로 적선을 뒤쫓는 데 나섰습니다.

비록 1593년 2월 웅포해전에도 거북선이 참전하여 활약한 기록이 발견된 것이지만 그 활약상은 1592년의 그것과 비할바가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선이 마지막으로 참전한 해전은 제가 예전에 알고 있던 부산포대첩이 아니라 웅포해전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거북선의 첫 전투는 사천해전이었고 마지막 전투는 웅포해전이었습니다.
(참고로, 웅포해전은 오늘날 불려지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나 이충무공전서 원문에는 웅천으로 나온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그런데 웅포해전 이후로, 거북선의 모습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한산도대첩 이후, 해전 금지령

왜군이 한산도대첩에서 참패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에게 조선 수군과 정면으로 맞붙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해전 금지령이었습니다.

부산포에서 왜적은 이미 이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배는 항구에 그대로 두었지만,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총과 화살로 응전했습니다. 그래도 470여 척이나 되는 적선이 눈앞에 있었기에, 조선 수군은 적선 100여 척을 침몰시킬 수 있었습니다.

웅포해전에서도 적은 깊은 포구에 왜선을 숨기고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곳에 진지를 만들어 왜선에 다가오는 조선 수군을 공격하며 왜선을 보호하였고, 조선 수군이 유인책을 써도 어느 정도만 따라나오다 다시 포구 속으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거북선이 활약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남해안 거점에 왜성 축조

1592년, 왜군은 가덕도(낙동강 하구 앞바다)·부산포·영등포(거제도) 같은 점령지에 방어용 진지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593년 5월, 한성에서 철수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식 명령서를 내려 남해안 요충지마다 성을 쌓으라 지시했습니다.

부산진성, 임랑포, 기장 죽성리, 구포, 김해 죽도, 눌차도, 웅천, 서생포 등 열아홉 곳에 왜성이 들어섰습니다. 정유재란 때 지어진 것까지 합치면 남해안 전체에 서른 곳이 넘습니다.

서생포왜성
서생포왜성

그중 서생포왜성이 가장 크고 화려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이 성은 해자를 포함한 전체 면적이 46,000평, 외곽 둘레만 2.5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성 안에는 지휘소인 천수각과, 장수의 거처로 쓰인 화려한 궁궐 같은 건물까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왜성은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산과 평지를 함께 두른 형태로, 성벽을 계단식으로 겹겹이 쌓아 각 구역이 따로 방어전을 치를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난공불락의 구조였습니다.
적선은 이런 왜성을 낀 항구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성 위에서 총통과 병력이 그 배들을 지켜주었습니다.

명나라와 왜 사이의 휴전 회담

1593년 3월부터 1596년 9월까지, 명나라와 왜 사이에는 긴 휴전 회담이 이어졌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을 배제한 채, 싸움을 중단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벌어진 전투는 제2차 당항포(1594), 장문포(1594) 정도가 전부입니다.
두 해전 모두 도망치는 적들을 소규모로 소탕하거나 왜적이 버리고 간 적선을 불태운, 전투라고 부르기 민망한 해전이었습니다.
 
그리고 1595년과 1596년 2년 동안에는 해전으로 기록될 만한 내용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명과 왜의 휴전 회담이 이어지며 왜적은 왜성에 숨어 아예 나오지 않았고 거북선은 싸울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1595년까지 거북선의 숫자를 3척에서 5척으로 늘립니다.
이는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문서를 모은 책인 《사대문궤》에 하기와 같은 기록으로 증명이 됩니다.

"을미년(1595),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 65척을 거느렸다"

1592년 9월 1일 부산포대첩 이후, 1593년 2월 웅천에서 짧게 이름을 남긴 것을 마지막으로, 1596년까지 거북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6편에서는 1597년 정유재란 발발과 이순신 장군 전사 이후까지도 거북선이 사라진 이유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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