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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이순신 장군과 진린 이야기 (4편 마지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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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에서 진린의 통곡 1598년 음력 11월 19일,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노량대첩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노량 바다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왜선 350에서 500여 척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선 조·명 연합 수군이 맞붙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 60여 척, 명나라 수군은 300여 척이 출전한 대규모 해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전에서 왜선은 겨우 50척만이 살아 돌아갔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격렬하게 이어진 전투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에 통곡하는 진린 도독 싸움이 끝난 직후, 장군의 전사 소식을 접한 진린 도독은 의자에서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통곡을 하며 말했다고 합니다. "함께 일할 사람이 없어졌구나!" 조선에 처음 와서는 그렇게 오만방자했던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의 죽음 앞에 둘도 없는 친구를 잃은 사람처럼 슬퍼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로 돌아간 진린은 황제(만력제)에게 표문을 올려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그는 장군을 가리켜 '세상을 경륜할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經天緯地)'이라 평가했고, 황제로 하여금 이순신 장군에게 포상하도록 추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가 만든 우애, '광동 진씨'의 한반도 정착 이순신 장군과 진린의 이 깊은 인연은 훗날 역사 속에서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진린의 손자인 '진영소'는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며 조부의 넋과 영혼이 담겨 있는 한반도로 망명을 결심합니다. 그는 조부가 목숨을 건 전쟁을 치렀던 전라남도 해남과 강진 일대에 자리를 잡았고, 이들이 바로 오늘날 한국의 '광동 진씨(廣東 陳氏)' 시조가 되었습니다. 현재도 전남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에는 진린 도독과 그 후손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황조별묘(皇朝別廟)'가 남아있습니다. 이...

⑦ 이순신 장군과 진린 이야기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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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왜교성 전투의 배경 1598년 음력 9월 말경, 남해안 일대에는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1598년 음력 8월 18일 사망)했다는 소문이 피난민과 포로들 사이에서 퍼진 것입니다. 일본 수뇌부는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 히데요시의 죽음을 극비에 붙였지만, 왜교성에 진을 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미 본국의 변고를 눈치채고 싸움 없이 무사히 철수할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난공불락이었던 순천 왜교성 이러한 정세 속에서 조·명 연합군은 왜교성의 왜군을 완전 소탕하기 위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치는 대규모 합동 작전을 펼치기로 합의했습니다. 수군은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이, 육군은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맡았습니다. 당시 난공불락이었던 순천 왜교성에 주둔한 왜군을 무찌르는 유일한 길은 육군과 수군의 합동 작전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빠져나가려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육군 총사령관 유정에게 막대한 뇌물 공작을 펼쳤고, 유정은 이 공작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결국 이 배신은 1598년 음력 10월 3일 밤, 바다에서 명나라 수군에게 큰 참극을 불러오게 됩니다. 10월 3일 밤, 유정의 배신과 썰물 전투 당일인 10월 3일 밤, 이순신 장군과 수군 지휘부는 "오늘 밤 조류가 이로우니 출전하겠다"고 육군 총사령관 유정에게 서신을 보내 허가를 받았습니다. 육군과의 협공을 기대하며 조·명 연합 함대는 왜교성을 향해 과감하게 진격했습니다. 조선 수군 장수들과 군사들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왜선 10여 척을 불태우고 끌어내는 등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정작 육지에서 호응하기로 했던 유정의 육군은 약속을 저버린 채 단 한 명의 군사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수군만 홀로 분전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한창 격전이 벌어지던 중 밀물이 끝나고 썰물이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갯벌에 배가 갇힐 것을 간파하고 즉시 ...

⑥ 이순신 장군과 진린 이야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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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에는 특정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소실되거나 누락된 구간이 많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삶 자체가 일기를 매일 기록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전쟁 마지막 해인 1598년 1월 5일부터 9월 14일까지의 기록이 통째로 사라진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 중 하나입니다. 절이도 해전 연구의 어려움 이 기간의 난중일기 볼 수 있다면, 오만했던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을 만나 변해가는 과정을 후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 기간의 난중일기는 전하지 않습니다. 절이도 해전을 언급한 기록들도 해전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 기록을 다룬 것이 아니라 일부만 전하고 있고, 기록들이 서로 다른 부분도 있어, 저는 이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문헌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목포해양대학교 해군사관학부 고광섭 교수님의 연구 논문을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 절이도 해전에 관한 고광섭 교수 연구 논문 보기 (2020) 또한, 저는 상기 연구 논문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1598년 8월 13일 선조에게 올린 장계를 바탕으로 쓴 '선조실록'과, 이순신 장군의 조카로서 당시 조선 수군 진영에서 행정, 외교업무를 도운 '이분'이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쓴 '이충무공행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절이도 해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선조실록'과 '이충무공행록'을 중심으로 절이도 해전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순신 장군과 '이분'이 실제 경험한 기록들로,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가장 두드러진다는 점 때문입니다. 절이도 해전, 조·명 연합수군의 첫 승리 절이도(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 해전은 1598년 음력 7월 18일, 왜군 100척이 녹도(현재 소록도)를 침범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명 연합 함대가 고금도에서 출발하여 금당도로 진격하며 서막이 올랐습니다. 당일에는 금당도에 2척의 왜선만 있어 이를 쫓아냈고 왜선 본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

⑤ 이순신 장군과 진린 이야기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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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였던 1598년 음력 6월 25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500여 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7월 16일 조선 수군의 본영인 고금도로 들어와 이순신 장군과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노량대첩이 그해 11월 19일에 있었으니, 명나라 수군은 전쟁이 끝나기 불과 5개월 전에야 파병된 셈입니다. 명나라 수군은 왜 늦게 파병되었는가? 사실 명나라는 몽골과 여진족을 상대해 온 전통적인 '육군 국가'였습니다. 수군 전력 자체가 보잘것없었고, 먼 바다로 함대를 파병하는 것은 명나라 조정 입장에서도 엄청난 예산과 큰 위험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임진왜란 초기에는 명나라가 수군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조선 수군이 알아서 잘 막고 있으니, 우리는 육군만 보내면 된다"는 것이 명나라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1597년, 원균의 칠천량 대패로 조선 수군이 전멸하다시피 하자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남해안의 빗장이 풀렸고, 승기를 잡은 왜군은 바다를 타고 전라도와 충청도 서해안까지 거침없이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명나라에게 단순한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바닷길이 뚫리면 자신들의 터전인 황해(서해)와 산둥반도, 북경까지 곧바로 왜군의 칼날에 노출되는 '자국 안보의 치명적 위기'였던 것입니다. 결국 명나라 조정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남방의 야전 사령관이자 왜구를 상대로 수전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진린을 '수군 총도독'으로 급히 발탁하여 500척의 함대를 모아 조선으로 파병했습니다. 징비록이 말하는 진린의 모습 1598년 음력 6월 25일 조선에 파병된 진린의 행태를 가장 잘 묘사한 글은 서해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징비록 (서해문집) 저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하에 서해문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