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이순신 장군과 진린 이야기 (1편)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였던 1598년 음력 6월 25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500여 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7월 16일 조선 수군의 본영인 고금도로 들어와 이순신 장군과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노량대첩이 그해 11월 19일에 있었으니, 명나라 수군은 전쟁이 끝나기 불과 5개월 전에야 파병된 셈입니다.

명나라 수군은 왜 늦게 파병되었는가?

사실 명나라는 몽골과 여진족을 상대해 온 전통적인 '육군 국가'였습니다. 수군 전력 자체가 보잘것없었고, 먼 바다로 함대를 파병하는 것은 명나라 조정 입장에서도 엄청난 예산과 큰 위험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임진왜란 초기에는 명나라가 수군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조선 수군이 알아서 잘 막고 있으니, 우리는 육군만 보내면 된다"는 것이 명나라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1597년, 원균의 칠천량 대패로 조선 수군이 전멸하다시피 하자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남해안의 빗장이 풀렸고, 승기를 잡은 왜군은 바다를 타고 전라도와 충청도 서해안까지 거침없이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명나라에게 단순한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바닷길이 뚫리면 자신들의 터전인 황해(서해)와 산둥반도, 북경까지 곧바로 왜군의 칼날에 노출되는 '자국 안보의 치명적 위기'였던 것입니다.

결국 명나라 조정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남방의 야전 사령관이자 왜구를 상대로 수전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진린을 '수군 총도독'으로 급히 발탁하여 500척의 함대를 모아 조선으로 파병했습니다.

징비록이 말하는 진린의 모습

1598년 음력 6월 25일 조선에 파병된 진린의 행태를 가장 잘 묘사한 글은 서해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징비록 (서해문집)
징비록 (서해문집)

저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하에 서해문집에서 나온 징비록 해당 내용을(205page-207page) 아래에 그대로 옮깁니다.

얼마 후 명나라 수병도독 진린이 고금도로 내려와 이순신과 합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린은 성격이 포악하고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모두들 그를 꺼려했다. 그가 출발할 때 임금께서는 청파 들판까지 나와 몸소 전송하셨다.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며, 찰방 이상규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며 피투성이를 만드는 모습을 본 나는 통역관에게 그를 풀어 주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여러 대신들에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순신이 패할 것 같소이다. 진린은 장수의 권한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고, 군사들 또한 제 마음대로 다룰 것이니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소?"

모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진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는 이순신은 병사들을 동원해 사냥을 한 다음 사슴·멧돼지·생선을 잡아 큰 잔치를 준비해 두었다. 진린의 배가 바다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군사를 배치한 후 멀리까지 나가 그를 맞이했다. 그런 후 그들 일행을 성대하게 맞아들이니 진린은 물론 장수와 병사들까지 아주 흡족하며 입을 모았다.

"이순신은 참으로 뛰어난 장수요."

얼마 후 적선이 가까운 섬을 공격해 왔다. 군사를 보내 적선을 물리치고 적의 머리를 40여 개까지 벤 이순신은 이를 진린에게 보내 그의 공으로 돌렸다. 진린은 뜻밖의 대우를 보자 너무나 기뻐했다. 이때부터 그는 무슨 일이든 이순신과 협의하여 처리했을 뿐 아니라 나들이를 나갈 때에도 이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하면서 절대 앞서 나가지 않았다.

이순신은 이후 진린과 합의하여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를 구별하지 않고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면 데려다 매로 다스리기기로 하였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명령을 따르게 되어 섬 안에 질서가 유지되고 백성들 또한 걱정 없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진린은 임금께 이런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낼 공이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쓴 것은 그가 마음으로부터 감복했기 때문이다. (이상 징비록 내용)

이런 진린이 7월 16일 조선 수군의 본영이 있는 완도 고금도에 들어와 이순신 장군과 첫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진린이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량대첩을 이미 알고 있던 진린

진린은 조선 파병 전, 중국 남방에서 왜구를 상대해 본 경험은 있었지만 본래 뼈가 굵은 쪽은 육전(陸戰)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으로 향하며 이미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무패의 장군이자, 단 13척으로 133척을 무찌른 '명량대첩'의 기적이 불과 한 해 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진린이 오만방자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진린의 눈에 비친 조선 수군은 명량에서 기적을 썼다고는 하나, 피땀 흘려 겨우 재건한 판옥선이 최대 60여 척 남짓의 초라한 전력이었고, 반면 자신은 대국(大國)의 500척 함대를 거느린 수군 총도독이었습니다. 진린은 대국의 수군 총도독으로, 초전에 기선을 제압하여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을 자신의 수하로 길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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