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이순신 장군과 진린 이야기 (2편)
난중일기에는 특정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소실되거나 누락된 구간이 많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삶 자체가 일기를 매일 기록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전쟁 마지막 해인 1598년 1월 5일부터 9월 14일까지의 기록이 통째로 사라진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 중 하나입니다.
절이도 해전 연구의 어려움
이 기간의 난중일기 볼 수 있다면, 오만했던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을 만나 변해가는 과정을 후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 기간의 난중일기는 전하지 않습니다.
절이도 해전을 언급한 기록들도 해전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 기록을 다룬 것이 아니라 일부만 전하고 있고, 기록들이 서로 다른 부분도 있어, 저는 이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문헌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목포해양대학교 해군사관학부 고광섭 교수님의 연구 논문을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 절이도 해전에 관한 고광섭 교수 연구 논문 보기 (2020)
또한, 저는 상기 연구 논문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1598년 8월 13일 선조에게 올린 장계를 바탕으로 쓴 '선조실록'과, 이순신 장군의 조카로서 당시 조선 수군 진영에서 행정, 외교업무를 도운 '이분'이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쓴 '이충무공행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절이도 해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선조실록'과 '이충무공행록'을 중심으로 절이도 해전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순신 장군과 '이분'이 실제 경험한 기록들로,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가장 두드러진다는 점 때문입니다.
절이도 해전, 조·명 연합수군의 첫 승리
절이도(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 해전은 1598년 음력 7월 18일, 왜군 100척이 녹도(현재 소록도)를 침범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명 연합 함대가 고금도에서 출발하여 금당도로 진격하며 서막이 올랐습니다.
당일에는 금당도에 2척의 왜선만 있어 이를 쫓아냈고 왜선 본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녹도만호 송여종으로 하여금 전선 8척을 절이도에 숨겨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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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이도 해전 상황 지도 |
다음 날인 1598년 음력 7월 19일, 왜군 본대가 녹도와 절이도를 통과하여 내려오고, 조·명 연합 수군은 금당도를 출발하여 절이도 서북 해안을 향해 북상하면서 본격적인 절이도 해전이 벌어집니다.
이 해전에서 녹도만호 송여종은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이며, 조선 수군은 왜선 100척 중 50척을 불태웠습니다. 조선 수군은 왜군의 시체가 바다에 가득하였으나 바쁜 와중에 70여 시체만 끌어올려 목을 베어 가져왔습니다.
진린에게 적의 수급을 양보하다
이때, 명나라 수군은 싸움에 참전하지 않고 뒤에서 구경만 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린 도독은 자신이 내세울 전공이 없자 부하 장수들에게 화를 내고 이순신 장군에게조차 공갈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진린 도독을 달래기 위해 40여 개의 수급을 진린 도독에게 주었습니다.
절이도 해전은 진린의 입장에서 보면, 말로만 듣던 이순신 장군의 능력을 처음으로 경험한 해전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적의 수급이나 자신의 전공 따위를 자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었지만, 40여 개의 수급을 받은 진린 도독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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