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㉜ 마지막 두 달의 일기, 말을 아낀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의 마지막 해, 1598년 무술년 일기는 아주 짧습니다. 1월 4일 다음이 곧바로 9월 15일입니다. 그사이 여덟 달 남짓은 친필 일기도, 전서본도 전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두 달 남짓입니다. 그 두 달도 한 벌이 아닙니다. 장군이 직접 쓴 친필 일기는 10월 7일에서 끝납니다.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일기는 11월 17일까지 이어집니다. 노량해전 이틀 전입니다. 그 사이 10월 13일부터 11월 7일까지는 전서본에도 빠져 있습니다. 두 개의 마지막 날 친필 일기의 마지막 — 10월 7일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이 군량 넷 ∙ 조 하나 ∙ 기름 다섯 되 ∙ 꿀 석되를 바쳤다. 김태정(金太丁)은 쌀 두 섬 한 말을 바쳤다." (난중일기 무술년 10월 초7일) 장군이 붓으로 쓴 마지막 문장은 백성이 바친 쌀과 꿀의 기록입니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의 각주를 보면, 이 문장은 전서에는 빠져 있고 친필에만 있습니다. 전서본의 마지막 — 11월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당진포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로부터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더니, 왜적은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 달아났고 잡은 왜선 및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이충무공전서』 권8, 무술년 11월 17일) 적의 군량선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배와 쌀은 명나라 군사가 가져갔습니다. 장수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장군은 그 일을 적고, 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두 판본 모두 쌀 이야기로 끝납니다. 하나는 백성이 바친 쌀이고, 하나는 빼앗긴 쌀입니다. 날카롭게 쓰던 사람 지난 글 「난중일기 초고본과 전서본」에서 장군의 날카로운 문장을 옮긴 적이 있습니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허튼소리가 많으니 가소롭다." (난중일기 계사년 5월 26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음흉하고 간사한 말을 많이 내뱉으니 몹시도 해괴하...

㉖ 이순신 전사 후 북채를 대신 잡은 손문욱, 그는 누구인가

1598년 11월 19일 새벽, 노량 바다 한복판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쓰러졌습니다. 곁에 있던 한 사람이 사람들의 곡소리를 막고, 시신을 옷으로 가리고, 대신 북을 쳐 진격을 독려했습니다. 군사들은 장군이 죽지 않았다고 믿고 다시 용기를 냈고, 전투는 조선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1월 27일) 이문욱(李文彧). 이 이름 석 자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인물은 대개 다른 이름, "손문욱(孫文彧)"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부터 둘이고, 그가 조선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조차 조정이 한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누구였을까요? "이문욱"인가 "손문욱"인가 실록에서 그의 이름은 시간이 지나며 바뀝니다. 1597년 4월부터 1598년 9월까지는 줄곧 "이문욱"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노량대첩을 16일 앞둔 1598년 11월 2일, 그가 이순신 장군의 명으로 명나라 진린 도독의 진영에 파견되었다는 기사부터 "손문욱"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그가 왜군 진영에서 완전히 벗어나 조선군에 정식으로 자리 잡은 시점과 맞아떨어집니다. 조선에 귀순한 일본 쪽 사람(항왜)이 조선식 성씨를 새로 받는 경우가 더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무렵 그가 "손(孫)"이라는 성을 얻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만 위에 인용한 노량대첩 승전 기사는, 실록 편찬자가 사건을 정리하며 붙인 논평(...

⑥ 몸철학 관점에서 본 이순신 장군의 삶과 죽음

나는 ‘ 내가 만난 이순신 장군 이야기 ’와 또 하나의 블로그 ‘ 몸철학 : 몸과 나누는 대화 ’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두 블로그를 시작할 때에는 각각의 블로그가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며칠 전 나는 "몸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썼다. 몸에서 시작한 대화가 이웃으로, 사회로, 마침내 우주로 넓혀질 때 비로소 철학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고 썼다. 👉 관련글 읽어보기 몸철학이란 무엇인가? 그 글을 쓰고 나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순신 장군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 그는 왜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을 굳이 하다가 죽었을까? 처음 이 물음에 답을 써 보았을 때는, 그 글에 어딘가 2퍼센트가 비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이야기와 통계로만 알았지, 몸철학의 관점에서는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려고 한다. 옷을 벗어준 사람 1596년 1월 23일,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 아침에 옷 없는 군사 열일곱 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 옷 한 벌이 없어 추위에 떠는 병사가 열일곱 명이라는 것을, 그는 숫자로 직접 기록했다. 그리고 한 벌이 아니라 두 벌을 챙겨 주었다. 같은 해 가을, 전라도를 돌아보던 길에서는 곤궁한 사정을 털어놓는 이중익이란 사람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었다. (난중일기 1596년 9월 13일) 이름을 부르며 통곡한 사람 기근과 역병이 조선 수군을 휩쓸던 1594년, 진에는 하루에도 이백 명 넘는 시신이 쌓였다.  " 병들어 죽은 시체 이백열일곱 명을 거두어 묻었다 "고 그는 적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적었다. "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 그해 4월, 옥포해전과 사천해전과 한산도대첩에서 물길을 이끌었던 조방장 어영담이 역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썼다. " 통탄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으랴! "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죽은 시신의...

⑩ “이순신 장군 5대 해전”을 알아보자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 무패의 장군이라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 5대 해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고 아예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오래 공부해 온 저로서는 "이순신 장군 5대 해전"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5대 해전은 시간순으로 펼쳐놓으면 임진·정유 7년 전쟁과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먼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을 "이순신 장군 5대 해전"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 5대 해전"은 학계에서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 중 옥포해전을 뺐습니다. 조선 수군의 첫 승리라는 상징성은 크지만, 판옥선 20여 척 대 왜선 30여 척이라는 전투 규모나 전쟁 전체에 미친 영향력을 놓고 보면 다른 네 해전과 나란히 놓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자리에 절이도해전을 넣었습니다. 명량대첩 이후, 실질적으로 남해안의 제해권을 다시 찾아온 전투가 바로 절이도해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해전의 규모나 그 결과가 미친 영향력을 고려하여, "이순신 장군 5대 해전"을 한산도대첩, 부산포대첩, 명량대첩, 절이도해전, 노량대첩으로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다섯 해전을 시간 순으로 따라가며 설명드리겠습니다. 1. 한산도대첩 (1592년 음력 7월 8일) — 학의 날개에 갇힌 적의 야망 옥포해전 이후 왜군 수군이 연이어 무너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예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이순신을 꺾으라 명합니다. 견내량 좁은 물목에 머물던 왜 함대를 이순신 장군은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냅니다. - **전력**: 조선 수군 판옥선·거북선 55여 척 vs 왜선 73척 - **결과**: 왜선 59척이 격침·나포되고, 왜군...

⑧ 이순신 장군과 진린 이야기 (4편 마지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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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에서 진린의 통곡 1598년 음력 11월 19일,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노량대첩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노량 바다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왜선 350에서 500여 척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선 조·명 연합 수군이 맞붙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 60여 척, 명나라 수군은 300여 척이 출전한 대규모 해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전에서 왜선은 겨우 50척만이 살아 돌아갔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격렬하게 이어진 전투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에 통곡하는 진린 도독 싸움이 끝난 직후, 장군의 전사 소식을 접한 진린 도독은 의자에서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통곡을 하며 말했다고 합니다. "함께 일할 사람이 없어졌구나!" 조선에 처음 와서는 그렇게 오만방자했던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의 죽음 앞에 둘도 없는 친구를 잃은 사람처럼 슬퍼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로 돌아간 진린은 황제(만력제)에게 표문을 올려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그는 장군을 가리켜 '세상을 경륜할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經天緯地)'이라 평가했고, 황제로 하여금 이순신 장군에게 포상하도록 추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가 만든 우애, '광동 진씨'의 한반도 정착 이순신 장군과 진린의 이 깊은 인연은 훗날 역사 속에서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진린의 손자인 '진영소'는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며 조부의 넋과 영혼이 담겨 있는 한반도로 망명을 결심합니다. 그는 조부가 목숨을 건 전쟁을 치렀던 전라남도 해남과 강진 일대에 자리를 잡았고, 이들이 바로 오늘날 한국의 '광동 진씨(廣東 陳氏)' 시조가 되었습니다. 현재도 전남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에는 진린 도독과 그 후손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황조별묘(皇朝別廟)'가 남아있습니다. 이...

⑨ 노량대첩, 100만 원혼과 조선 백성을 위한 마지막 진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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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노량대첩은 없었다 노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전투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전투 작전권을 쥐고 있던 명나라는 조선의 삼남 지방을 일본에 떼어주고라도 전쟁을 속히 끝내길 원했습니다. 일본군이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하자 명군은 일본군과 거리를 둔 채 조선 백성들을 수탈하며 소일할 뿐이었습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며 철군 명령이 내려지자 명군은 이를 환영하며 조용히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습니다. 조선의 기득권 세력 역시 명군의 눈치를 볼 뿐이었습니다. 7년 전쟁, 누구도 위로하지 않은 100만 백성의 원혼 7년 전쟁 동안 100만 명의 조선 백성이 죽어 나갔습니다. 명나라와 조선의 기득권 세력에게 조선 백성의 목숨은 마치 곤충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장군에게는 명나라 황제가 내린 상도, 선조가 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위도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지난 7년간 죽어간 백성들의 원한에 대한 위로와 보복, 그리고 다시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왜군을 굴복시키는 ‘완벽한 승리’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왜군의 퇴로를 열어주어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던 명군의 의사와 달리, 장군은 스스로 노량의 바다를 마지막 전쟁터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실제 전투 모습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생각할 때 광화문을 지키는 장군의 동상을 쉽게 머리에 떠올립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동상은 이순신 장군의 실제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은 칼을 쓰신 분이 아니라 활을 주로 쓰신 장군이었습니다. 난중일기에도 활을 쏘시는 모습이 수시로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긴 칼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을 잡고 있거나 활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었다면 더 멋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자주 해 봅니다. 일각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대첩에서 일부러 갑옷을 벗고 북을 치다 총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