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이순신 장군의 중위장이자 친한 벗, 권준 장군

권준은 누구인가?

권준(權俊) 장군은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는 언경(彦卿)입니다.

1547년에 태어났으니, 이순신 장군보다 두 살 아래입니다.

그는 개국공신 권근(權近)의 7대손이며, 아버지 권눌(權訥)은 금갑도만호(金甲島萬戶)를 지냈습니다. 1579년(선조 12), 서른셋의 나이로 식년 무과에 갑과로 급제했습니다. 그리고 1589년(선조 22), 마흔셋의 나이로 순천도호부사(정3품)에 임명됩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빠른 승진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3년 전, 권준 장군은 이미 순천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전쟁 전부터, 자주 오가던 사이

난중일기에서 권준 장군이 처음 등장하는 날짜는 1592년 1월 26일, 전쟁이 나기 석 달 전입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흥양현감(裵興立)과 순천부사(權俊)이 와서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1592년 1월 26일)

대단한 사건도 아닌, 그저 이웃 고을 수령이 놀러 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짧은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 이후 7년 내내 놀라울 정도로 반복됩니다.

실제로 난중일기 전체에서 "권준"이라는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것만 55회, 자(字)인 "언경"까지 더하면 63회입니다. 여기에 그가 순천부사로 있던 1592년부터 1594년 10월까지, 이름 없이 그냥 "순천부사"라고만 적힌 대목까지 더하면 121회가 더 나옵니다(1594년 10월 이후에 나오는 "순천부사"는 후임자인 박진·정석주를 가리키는 것이어서 뺐습니다). 「이순신의 사람들」 두 번째 편에서 소개한 이억기 장군의 등장 횟수가 78회였으니, 그보다도 훨씬 많은 셈입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벼슬 이름만 적어도 누구인지 통했다는 것 자체가,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정확히 언제부터 알고 지냈을까요? 권준 장군은 1589년부터 순천부사였고, 이순신 장군은 1591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로 부임했습니다. 순천은 전라좌수영(여수)의 이웃 고을이니, 늦어도 1591년 2월부터는 두 사람이 이웃 고을을 맡은 사이로 서로 알고 지냈을 것입니다. 좌수사 부임과 난중일기의 첫 기록(1592년 1월 26일) 사이에는 약 열 달의 간격이 있는데, 그사이 이미 격의 없이 놀러 올 정도의 사이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한산도대첩과 부산포대첩의 맹장

전쟁이 터지자, 권준 장군은 순천부사로서 조선 수군의 중위장(中衛將)을 맡습니다.

중위장은 함대가 진을 짤 때 중심 부대를 맡는 자리로, 좌부장∙우부장∙전부장∙후부장 등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전투마다 믿을 만한 장수에게 맡기던 자리였습니다.

1592년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순천부사 권준(權俊)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 나라 남자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한산도대첩 장계, 1592년 7월 8일)

여러 장수들의 전과 가운데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 권준 장군입니다.

두 달 뒤인 9월 1일, 부산포대첩에서도 권준 장군은 중위장으로 정운(鄭運)·이순신(李純信)·신호(申浩) 등과 함께 선봉에서 곧바로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산포대첩 직후, 이순신 장군이 올린 9월 11일자 장계에는 권준 장군을 포함한 다섯 장수에 대한 신뢰가 특별한 문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어영담(魚泳潭)∙배흥립(裵興立)∙정운(鄭運)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권준(權俊)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되었으나, 오직 이순신(동명이인 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기를 엎드려 기다린다." (장계, 1592년 9월 11일)

같은 장계에서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대첩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을 두고 "믿을 사람은 오직 정운 등 두세 사람"이라고도 적었습니다(「이순신의 지음, 정운 장군」 편 참고). 권준 장군은 바로 그 정운 장군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했다고 밝힌 다섯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매일 보다시피 한 사이

난중일기에는 "순천부사가 왔다", "순천부사와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셀 수 없이 반복됩니다.
노루고기와 소고기를 나누고, 활을 쏘고, 바둑과 장기를 두고,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1593년 3월 5일에는 권준 장군이 병이 나 본영으로 돌아가게 되자, 이순신 장군이 몸소 배웅합니다.

"순천부사(권준)가 병으로 도로 돌아간다기에 아침에 몸소 배웅하여 보냈다." (난중일기 1593년 3월 5일)

같은 해 6월 15일에는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정걸, 낙안군수 신호, 방답첨사 이순신과 더불어 "철맞이 음식을 먹으며 놀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는 기록이, 8월 15일 한가위에는 더 많은 장수들이 모여 하루를 함께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이순신 장군의 멘토, 정걸 장군」 편 참고). 권준 장군은 이런 자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파직과 복귀, 그리고 경상우수사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594년 10월 25일, 권준 장군은 순천부사 자리에서 파직되어 압송됩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난중일기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그날의 짧은 기록에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순천부사 권준이 잡혀 갈 때에도 보러 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난중일기 1594년 10월 25일)

그런데 다섯 달 뒤인 1595년 3월 16일, 권준 장군은 '동지(同知)'라는 벼슬을 받고 본영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명량대첩보다 앞서 조정에 밉보여 파직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의 후임으로 권준 장군이 임명됩니다.

"저녁에 금오랑이 경상수사 배설(裵楔)을 잡아갈 일로 들어왔다. 권준(權俊)을 수사로 임명한다는 조정의 공문과 유서와 밀부도 왔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14일)

순천부사에서 파직되었던 사람이 다섯 달 만에 복귀하고, 다시 석 달이 채 안 되어 수군절도사(경상우수사)로 승진한 것입니다.

국수와 거문고, 편한 벗의 생일

경상우수사가 된 뒤에도 권준 장군은 여전히 편한 벗이었습니다. 1595년 6월 26일,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이 권언경(權彦卿) 영감의 생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도 몹시 취하며 거문고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26일)

언경(彦卿)은 권준 장군의 자입니다. 벼슬 이름이 아니라, 서로 편안한 사이에서 사용되는 자로 부르며 생일을 함께 챙기는 모습, 저는 여기서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얼굴을 봅니다. 전쟁 중에도 국수를 만들어 먹고,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거문고와 피리 소리를 듣는 저녁이 있었다는 사실이 뜻밖입니다. 이순신 장군에게 권준 장군은 전략을 함께 세우는 참모인 동시에,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정유재란 무렵 권준 장군은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자리를 옮겼고, 1601년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 1605년에는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습니다. 1604년에는 임진왜란의 공로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어 안창군(安昌君)에 봉해졌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607년, 해랑도(海浪島)에 출몰한 해적을 소탕하지 못한 책임으로 문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뒤, 권준 장군은 1611년 돌아가신 것으로 전해집니다.

특이한 점은, 권준 장군에 대해서는 영정이 남아있지않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묘지는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 산5-16에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글을 마치며

정운 장군이 '지음'이었고, 이억기 장군이 '가장 가까웠던 동료'였고, 정걸 장군이 '멘토'였다면, 저는 권준 장군을 이순신 장군의 중위장이자 '친한 벗'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한산도대첩과 부산포대첩에서 가장 먼저 돌진한 맹장이면서, 동시에 국수를 나눠 먹고 거문고 소리에 취할 수 있었던 사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이런 친한 벗이 있었다는 것이, 저는 이순신 장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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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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