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이순신 장군의 '지음', 정운 장군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부터 저는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새 연재를 시작하려 합니다.
난중일기와 장계에 기록된 인물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어, 그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그 인물들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보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인물은 '이순신 장군의 오른팔'로 불리는 정운(鄭運) 장군입니다.
정운 장군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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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 장군 |
정운 장군은 본관이 하동(河東)이고 자는 창진(昌辰)입니다. 1543년에 태어났으니 이순신 장군보다 두 살이 많았고, 무과 급제도 이순신 장군보다 앞섰습니다. 전라도 영암, 지금의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570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 함경도 거산찰방, 웅천현감 등을 거쳤습니다. 성격이 강직해서 관직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1591년, 마흔아홉의 나이로 녹도(전남 고흥)의 만호로 부임합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불과 1년 전의 일입니다.
"경상도 바다도 조선의 바다입니다"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4월, 이순신 장군은 큰 고민에 빠집니다. 조정의 명령이 없는 한 관할 구역인 전라좌수영을 벗어나 경상도 바다로 나가 싸우는 것은 월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출전을 주저하며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때 정운 장군은 출전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전해집니다. 경상도의 바다를 내주면 결국 전라도도 지킬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정확한 문구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지만, 정운이 가장 앞장서서 출전을 밀어붙인 인물 중 하나였다는 점은 여러 자료가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출전을 결정했고, 그것이 옥포해전, 그리고 이어지는 조선 수군의 첫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정운은 그 후로도 옥포·적진포·사천·당포·당항포·율포·한산도 등 거의 모든 초기 해전에서 돌격장으로 맨 앞에 섰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믿었던 두 사람
전라좌수영 안에서 정운 장군은 군관(당시 지휘관 직속 참모 겸 전투 장교) 송희립(宋希立)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두 사람으로 꼽혔다고 전해집니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장계에도 정운에 대한 신뢰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1592년 9월 11일에 올린 장계에서 장군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맡은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만한 사람입니다. 사변이 일어난 이래 의기를 격발하여 나라를 위해서 제 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더욱 더 하므로 믿을 사람은 오직 정운 등 두세 사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점이 있습니다. 송희립은 이순신 장군의 군관, 즉 장군 곁에서 늘 함께 움직이는 직속 참모였습니다. 반면 정운 장군은 녹도(전남 고흥)를 맡은 만호로, 자신의 부대를 따로 지휘하는 독립된 지휘관이었습니다. 늘 곁에 두고 부리는 직속 참모가 신임을 받는 것과, 별도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 이 정도의 신뢰를 얻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정운의 전사를 두고 훗날 사람들이 "오른팔을 잃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어쩌면 직속 참모가 아니면서도 이렇게 큰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부산포대첩, 정운 장군의 마지막 하루
1592년 음력 9월 1일, 조선 수군은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향합니다. 대선 470여 척이 정박한 부산포는 조선 수군이 그때까지 맞선 왜군 진영 중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정운 장군은 이 전투에서도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 서서 싸웠습니다.
부산포는 이전까지의 해전과 조건이 달랐습니다. 왜군은 부산진성과 주변 언덕에 자리를 잡고, 그 아래 바다에 떠 있는 조선 수군을 내려다보며 조총과 대조총을 퍼부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몸을 숨길 곳 하나 없이 완전히 노출된 채로 싸워야 했습니다. 이런 불리한 조건 때문에 부산포대첩은 그때까지 치른 해전 중 조선 수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전투로 남았습니다. 조선 수군의 인명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25명이었습니다. 정운 장군은 이 여섯 명의 전사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가장 직급이 높은 장수였습니다.
그리고 이날, 정운 장군은 전사합니다. 안타깝게도 정운 장군이 정확히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투 직후 조정에 올린 장계 「부산파왜병장」은 큰 탄환이 정운 장군의 정수리를 꿰뚫었다고 적었습니다. 반면 1594년 병조참판 심충겸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실은 『선조실록』과 『항의록』·안방준의 『은봉전서』 계통 기록은, 왜군의 대조총(大鳥銃)이 방패 세 겹과 쌀 두 섬을 뚫고 정운의 가슴을 관통했다고 전합니다. 대조총은 일반 조총보다 크고 관통력이 센 화기로, 왜군이 성이나 배 같은 방어물을 뚫을 때 쓰던 무기입니다.
저는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가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큰 탄환은 대조총을 의미하겠지요? 당시, 산 위에서 쏘아대는 조총과 대조총의 위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오른팔이자 '지음'
정운 장군의 전사 소식에 이순신 장군은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집니다. 장계에는 다음과 같은 애도의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날 돌아올 무렵에 철환을 맞아 죽었지만, 그 늠늠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아주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운의 혼을 홀로 두지 않기로 합니다. 5년 전인 1587년 흥양(고흥) 앞바다 손죽도에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조카뻘 장수 이대원(李大源)의 사당이 녹도 포구에 이미 있었는데, 이순신 장군은 정운 장군의 혼을 이 사당에 함께 모셔 제사 지내도록 조치합니다.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도 그 포구에 있으므로 같은 제단에 초혼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어 한편으로는 의로운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남을 경계해야겠다."
이 사당이 오늘날 고흥 녹동항에 남아 있는 쌍충사(雙忠祠)입니다. 두 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으로, 1683년 조정으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았고 지금은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휘하 장수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해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영전에 바친 것입니다. 이 글은 이순신 장군의 문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1 「잡저(雜著)」편에 「제증참판정운문(祭贈參判鄭運文)」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전해집니다.
어허 인생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나니,
사람으로서 한번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 게 없것마는,
오직 그대 죽음에 마음 아픈 까닭은,
나라가 불행하여 오랑캐 쳐들어와, 영남의 여러 성이 바람 앞에 무너지자,
몰아치는 그들 앞에 어디고 거침없어,
우리 도성 하루저녁 적의 소굴 되었도다.
천리 관서로 임금의 수레 옮기시고, 북쪽 하늘 바라보면 간담이 찢기것만
슬프다, 둔한 재주 적을 칠 길 없을 적에,
그대 함께 의논하자 해를 보듯 밝았도다.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나가더니, 외적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 흘리며,
검은 연기 구름 동쪽을 덮었도다.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 공로런가, 종사를 회복함도 기약할 만하겠더니
어찌 뜻하였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적탄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여,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아와 채비를 다시 차려 원수 갚고자 맹세하였더니,
어둡고 바람조차 고르지 않아 소원을 못 이루매,
평생의 통분함이 이 위에 더할 소냐.
여기까지 쓰고 나니 살을 에듯 아프구나,
믿는 이 그대인데 이제는 어이할고.
진중의 모든 장수 원통이 여겼거니와,
그 재주 다 못 펴고, 덕은 높되 지위 낮고,
나라는 불행하고 군사 백성 복이 없고.
그대 같은 충정이야말로 고금에 드문지라,
나라 위에 던진 그 몸 죽어도 살았도다.
슬프다, 이 세상에 누가 내 속 알아주리,
극진한 정성으로 한 잔 술을 바치노라.
어허 슬프도다.
이순신 장군은 부하 장수의 죽음 앞에서는 이렇게 사사로운 슬픔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저는 이순신 장군에게 정운 장군은 가장 가까운 친구, 다시 말해, '지음'과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이순신 장군의 글에서 그것을 충분히 느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운 장군을 이순신 장군의 오른팔로 부르지만, 저는 이 글을 읽고, 정운 장군을 이순신 장군의 '지음'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지음'을 잃어본 사람들은 압니다. 이순신 장군의 저 제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오늘날 정운 장군을 기억하며
정운 장군은 전사한 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습니다.
1796년에는 정조가 병조판서로 다시 가증했고, 1798년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정운 장군을 기리는 자리는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태어난 고향인 해남 옥천면 대산리에는 1681년(숙종 7년)에 세워진 정운충신각(鄭運忠臣閣, 전라남도 기념물 제76호)이 있고,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정운 장군이 전사한 부산 다대동 몰운대에는 1798년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부임하며 세운 정운공순의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96년, 해군은 장보고급 잠수함 6번함에 그의 이름을 붙여 정운함(SS-067)으로 명명했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 연재는 앞으로 이억기, 어영담, 배흥립, 권준, 신호, 나대용, 송희립, 정걸, 안위 등의 인물들로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인물들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② 이순신 장군과 가장 가까웠던 동료 장군, 이억기 장군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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