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라벨이 이순신의사람들인 게시물 표시

⑯ 조정에서 장군을 천거한 사람, 류성룡

지금까지 「이순신의 사람들」에서는 바다에서 장군과 함께 싸운 장수들을 만났습니다. 이번 글부터 세 편은 조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다가 아니라 조정에서 장군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장군을 천거한 류성룡, 장군을 변호한 이원익, 그리고 옥에 갇힌 장군을 살려낸 정탁입니다. 첫 번째는 류성룡입니다. 류성룡과 이순신 장군의 인연은 누구나 압니다. 두 사람은 한양 건천동에서 함께 자란 이웃이었습니다. 류성룡이 세 살 위였습니다. 전쟁 직전에 류성룡이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전쟁 중에 실제로 만난 날은 거의 없습니다. 류성룡은 조정에 있었고, 장군은 바다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이어 준 것은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장군의 꿈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난중일기와 선조실록, 그리고 류성룡이 직접 쓴 『징비록』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591년, 파격 승진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류성룡은 『징비록』에 장군을 천거한 일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때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날로 급속하게 퍼지자, 임금님께서 비변사에 명하여 장수될 만한 재목을 각자 천거하도록 하였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하여 드디어 정읍 현감에서 등급을 뛰어넘어 수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사람들 중에 더러 파격 승진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종6품 현감이 정3품 수사가 되었습니다. 일곱 등급을 한꺼번에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 뒤로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나중에 두 사람 모두에게 짐이 되기도 합니다. 전쟁 한 달 전에 도착한 책 1592년 3월, 한양에서 장군에게 책 한 권이 왔습니다. "저물녁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 류성룡의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난중일기 임진년 3월 5일) 『증손전수방략』은 싸움과 수비의 방법을 다룬 병법서입니다. 한 달 뒤인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습니다. 바다와 조정 사이를 오간 편지 난중일기에는 류성룡과...

⑫ 비겁한 장수에서 용감한 장수로 거듭난 장군, 안위 장군

안위 장군은 누구인가? 안위(安衛) 장군은 본관이 순흥(順興)이고, 1563년 전라도 김제에서 태어났습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일어났을 때 정여립과 5촌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좌되어 곤장을 맞고 평안도로 유배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위 장군은 평안도 영유(永柔)에서 열린 무과에 급제하며 다시 관직에 나설 길을 얻었습니다. 대동찰방 겸 조방장을 거쳐, 1594년 거제현령에 임명됩니다. 그 뒤로 안위 장군은 난중일기에 자주 얼굴을 비칩니다.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을 찾아와 왜적의 동태를 보고하고, 함께 새 감사를 맞이할 일을 의논하며, 술자리에도 어울리는 평범한 모습입니다. 눈에 띄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고 나서부터입니다. 칠천량, 통곡하는 사람들 속에서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궤멸당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때 파직되어 백의종군 중이었는데, 패전 소식을 듣고 직접 남해안을 돌며 상황을 살핍니다. 대패 닷새 뒤인 7월 21일의 기록입니다. "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安衛)∙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여나믄 명이 와서 통곡하였으며,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21일) 경상수사 배설은 도망가 보이지 않았고, 살아남은 이들은 눈물로 그날의 참상을 전했습니다.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21일) 그날 밤, 이순신 장군은 다른 곳이 아니라 안위의 배 위에서 밤을 지새웁니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함께 이야기했다. 밤 세 시(四更)가 되어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21...

① 이순신 장군의 '지음', 정운 장군

이미지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부터 저는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새 연재를 시작하려 합니다. 난중일기와 장계에 기록된 인물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어, 그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그 인물들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보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인물은 '이순신 장군의 오른팔'로 불리는 정운(鄭運) 장군입니다. 정운 장군은 누구인가? 정운 장군 정운 장군은 본관이 하동(河東)이고 자는 창진(昌辰)입니다. 1543년에 태어났으니 이순신 장군보다 두 살이 많았고, 무과 급제도 이순신 장군보다 앞섰습니다. 전라도 영암, 지금의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570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 함경도 거산찰방, 웅천현감 등을 거쳤습니다. 성격이 강직해서 관직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1591년, 마흔아홉의 나이로 녹도(전남 고흥)의 만호로 부임합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불과 1년 전의 일입니다. "경상도 바다도 조선의 바다입니다"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4월, 이순신 장군은 큰 고민에 빠집니다. 조정의 명령이 없는 한 관할 구역인 전라좌수영을 벗어나 경상도 바다로 나가 싸우는 것은 월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출전을 주저하며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때 정운 장군은 출전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전해집니다. 경상도의 바다를 내주면 결국 전라도도 지킬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정확한 문구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지만, 정운이 가장 앞장서서 출전을 밀어붙인 인물 중 하나였다는 점은 여러 자료가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출전을 결정했고, 그것이 옥포해전, 그리고 이어지는 조선 수군의 첫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정운은 그 후로도 옥포·적진포·사천·당포·당항포·율포·한산도 등 거의 모든 초기 해전에서 돌격장으로 맨 앞에 섰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