㉑ 가장 두려운 적, 기근과 역병 속에서

저는 철이 들면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궁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질문을 할아버지께 직접 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 질문을 직접 했었습니다.
저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그 두 분이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배고픔이지"
저는 그것이 왜 가장 두려운지 잘 모릅니다. 배고픈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분이 같은 대답을 했기 때문에 저는 아직도 인생에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이 배고픔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알아 가면서 저는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두려운 적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왜적에 대해서는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을 했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겠습니다. 왜적은 절대 이순신 장군이 가장 두려워한 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선조'일까요? 아닙니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죽이려고 의금부에 가뒀을 때에조차 이순신 장군은 "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죽게 되면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순신 장군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게도 두려운 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근과 역병이었습니다.

계갑대기근, 조선을 삼키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계사년(1593)과 갑오년(1594)에 걸쳐, 조선은 역사상 손꼽히는 식량 위기를 겪습니다. 전쟁으로 농경지가 파괴되고, 농사를 지을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그나마 저장된 식량은 군량미로 수탈이 되었습니다. 훗날 이 시기는 "계갑대기근"이라 불립니다.
기근은 두 국면으로 이어졌습니다. 1차 국면은 1592년 겨울부터 1593년 여름까지입니다. 농사를 짓지 못해 양식이 바닥났고, 영양실조와 면역력 저하 속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2차 국면은 1593년 겨울부터 1594년 여름까지입니다. 1차 국면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을 다시 덮친 시기로, 참혹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식량이 없어 도둑이 들끓었고, 인육을 먹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난중일기에도 계갑대기근과 그로 인한 역병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나옵니다.

조선 수군이 겪은 기근과 역병

갑오년(1594) 1월, 한산도 진에 참혹한 소식이 이어집니다.
"병들어 죽은 자들을 거두어 장사지낼 차사원으로 녹도만호를 정하여 보냈다." (난중일기 갑오년 1월 20일) 다음 날, 녹도만호가 돌아와 보고합니다. "병들어 죽은 시체가 이백열네 명을 거두어서 묻었다." (난중일기 갑오년 1월 21일)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병들어 죽은 시체 이백열일곱 명을 거두어 묻었다." (난중일기 갑오년 1월 22일) 이틀 사이 431명을 묻었습니다.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이순신 장군에게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 및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고 전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난중일기 갑오년 1월 19일)

이순신 장군, 스스로도 쓰러지다

두 달 뒤, 이번에는 이순신 장군 자신이 쓰러집니다.
3월 4일부터 사흘간 벌어진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선 스물한 척을 남김없이 불태웠습니다. 다급해진 왜군이 명나라 측에 매달렸는지, 사흘째 되던 갑오년 3월 6일 저녁 명나라 도사부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는 패문을 보내왔습니다.
애써 이긴 싸움을 눈앞에서 멈춰야 했던 그날부터, 일기에는 "몸이 몹시 괴롭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꼼짝하기조차 어렵다." (3월 7일)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아팠다." (3월 8일)
나았다 싶으면 다시 앓기를 반복하며, 이 투병은 3월 27일까지 3주 넘게 이어집니다. 그사이에도 장계를 쓰고, 활을 쏘고, 공무를 처리했습니다.

4월 1일, 이순신 장군은 여제(厲祭)를 지냅니다. 역병으로 죽은 원혼을 달래는 제사입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여든(1,080) 동이를 나눠 먹였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뒤, "조방장 어영담(魚泳潭)이 세상을 떠났다. 통탄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으랴!" (난중일기 갑오년 4월 9일)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도대첩에서 물길을 이끌었던 어영담이었습니다. 전투에서도 잃지 않았던 그를, 역병이 데려갔습니다.

당시 조정에 올라간 보고에 따르면, 1594년 한 해 동안 역병으로 죽은 병사가 1,904명, 앓아누운 병사가 3,759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병력의 40%가 전투력을 잃은 셈입니다. 이듬해인 1595년에도 역병이 다시 번지면서 수군 병력이 4,109명까지 줄어들었습니다.

기록이 전하는 1594년 역병으로 죽은 수군 병사가 1,904명이라면, 이순신 장군이 7년 전쟁 기간 동안 칠천량을 제외하고 자신이 참전한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죽은 조선 수군의 총합, 200에서 최대 500여 명보다도 많은 숫자입니다. 이 숫자만 보아도 기근과 역병이 이순신 장군에게는 최고 두려운 적이었을 것입니다.

최민식 배우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

저는 이 글을 마치기 전에 이순신 장군의 마음속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아무리 승리를 했다고 해도 그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병사들을 위로하고 지극한 예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병사의 가족들까지 챙겼습니다.
병사와 일반 백성들의 목숨 하나라도 덜 희생시키고자 노력한 모습을 여러 기록을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순신 장군에게 기근과 역병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의 고통은 그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군 스스로도 3주간 함께 아팠는지 모릅니다. 이런 동병상련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이 고통을 끝내고 다른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죽으리라'

아래 명량이라는 영화에서 이순신 장군 역을 맡았던 최민식 배우가 가진 질문에 대해 저는 이 대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CF94qIgkY3Y?si=C5O6cSUx8TsZAP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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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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