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칼의 노래'가 아니라 '활의 노래'다

우리는 흔히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때 그가 남긴 명검이나, 광화문 광장에 늠름하게 서서 긴 칼을 짚고 있는 동상의 모습을 먼저 머릿속에 그립니다. 김훈 작가가 쓴 유명한 책의 제목도 ‘칼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장군의 실제 삶과 전투를 기록한 '난중일기' 7년의 행적을 깊이 들여다보면, 장군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은 칼이 아니라 ‘활’이었습니다. 장군에게 활쏘기는 단순한 무예 훈련을 넘어 7년 전란을 관통하는 그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칼의 노래가 아니라 활의 노래다
칼의 노래가 아니라 활의 노래다

임진왜란 조선 각궁과 왜군 조총의 무기 성능 비교

장군이 그토록 활쏘기에 전념했던 것은 조선군이 가진 무기체계의 강점과 약점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임진왜란의 주역으로 왜군의 조총을 꼽지만, 연속 사격 능력인 연사력 면에서는 조선의 활이 조총을 압도했습니다. 왜군의 조총은 화약을 넣고 탄환을 다지는 복잡한 과정 탓에 숙련자라도 1분에 겨우 1~2발을 쏘는 것이 한계였습니다.
반면 조선의 각궁은 시위만 당기면 1분에 6발에서 많게는 10발까지 빗발치듯 쏘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최대 사정거리 면에서도 조선의 활은 200~300미터를 날아가며 조총의 사거리를 뛰어넘었습니다. 물론 50미터 이내의 근접전에서는 조총의 무시무시한 관통력이 위협적이었고, 왜군은 이 조총의 위력과 장기인 백병전을 앞세워 전란 초기 육전을 장악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펼친 전략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왜군이 조총을 쏘거나 배를 타고 기어오르는 근접 거리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 것, 즉 철저한 ‘원거리 타격전’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 불패 신화의 핵심 전술

장군은 먼저 거대한 판옥선에 실린 천·지·현·황 총통을 쏘아 멀리서 왜선을 박살 냈습니다. 그리고 대포를 재장전하는 빈틈이나 대포의 사각지대로 왜군이 접근해 올 때, 사거리가 길고 연사력이 빠른 활을 소나기처럼 퍼부었습니다. 왜군이 조총을 재장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활로 숨통을 조인 것입니다. 대포로 배를 깨부수고 활로 조총의 접근을 완벽히 차단하는 전술, 이것이 바로 이순신 해전이 거둔 불패 신화의 실체였습니다. 그렇기에 장군은 본영에 머무는 평시라면 지독할 정도로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난중일기, 숫자로 증명되는 철저한 자기관리

'난중일기' 속 기록을 보면 장군이 활을 쏜 날이 통틀어 270여 일입니다. 7년 전란 기간을 생각하면 270여일은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계산해 보아야 할 숨겨진 숫자들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지속된 전체 기간은 약 2,500여 일이며, 이 중 후대에 소실되거나 일기가 기록되지 않은 누락 일수가 무려 약 910여 일에 달합니다. 즉, 실제로 일기가 남아 있는 날은 약 1,590여 일입니다. 이 남은 일기 속에서 장군이 활을 잡을 수 없었던 날들을 헤아려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첫째로 직접 배를 타고 나가 격전을 벌인 '실전 및 출병 기간'이 약 240여 일,
둘째로 폭우와 혹한 등 기상이 악화된 날이 약 380여 일,
셋째로 토혈과 곽란 등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건강 악화 기간'이 약 150여 일입니다.
여기에 넷째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투옥되거나 지휘권 없이 걷던 '백의종군 기간'이 약 120여 일,
마지막 다섯째로 종일 조정 사신을 접대하거나 회의 및 이동에 시간을 다 쓴 '공무 기간'이 약 430여 일에 이릅니다.

이 5가지 불가피한 사유를 모두 더하면 약 1,320여 일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결국 일기가 존재하는 1,590여 일 중에서 활을 쏠래야 쏠 수 없었던 1,320여 일을 빼고 나면, 장군에게 온전히 활을 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졌던 날은 고작 270여 일 남짓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즉, 장군은 몸을 움직여 시위를 당길 수 있는 날이라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활을 잡았던 것입니다. 평시에는 매일같이 군대를 검열하고 시합을 붙여 상벌을 내렸으며, 심지어 홀로 술에 취해 가슴속 울분이 차오르는 밤에도 활을 쏘며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50대의 나이에 하루 150발의 화살을 쏘아 올린 날이 있을 정도로, 장군에게 활쏘기는 흐트러지는 자신을 다잡고 오직 과녁 하나에만 집중하는 무서운 평정심의 수행이었습니다.

노량대첩 전사 순간의 진실과 군인으로서의 삶의 태도

이러한 장군의 삶의 태도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가 맞이한 마지막 전투인 노량대첩의 순간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일각에서는 장군이 노량의 밤바다에서 일부러 갑옷을 벗고 북을 치다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극적인 이야기를 짜 맞추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이순신 장군의 본모습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라던 장군이 일부러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했을 리 만무합니다.

장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평생을 닦아온 활을 쥐고 어두운 노량의 바다 위로 화살을 날려 적을 사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들 속에서 마침내 화살이 동나 더 이상 활을 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북채를 쥐어 잡고 군사의 사기를 돋우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군인으로서 철저히 몸을 닦고 유비무환을 실천했던 그였기에, 마지막 전투에서도 활이 다하는 순간까지 격렬히 싸우다 천명을 맞이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활의 노래'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군의 퇴로를 열어주려던 명나라 군대와 눈치만 보던 조정 세력을 뒤로하고, 오직 버림받은 100만 백성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노량의 바다를 스스로 선택했던 장군. 그가 백성을 위해 자신을 마지막 제물로 바치기까지 매일 당겼던 활시위야말로 이순신 장군의 참 모습입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활쏘기를 하였다고 기록한 날이 270여일 나옵니다. 이것은 7년 전쟁동안 상황이 허락하는 한 하루도 빠짐없이 활쏘기를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장군은 활쏘기를 전투의 승리를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이 몸소 훈련을 철저히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광화문에 가면 이순신 장군이 오른손으로 큰 칼을 잡고 있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순신 장군이 칼을 잡고 있다고 해도 이순신 장군은 칼을 왼손으로 잡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동상을 볼 때마다 이순신 장군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팽팽한 활시위를 당기는 참모습으로 바뀔 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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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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