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독일로 떠나는 딸과 함께 찾은 이순신 장군 생가터

2020년의 유난히도 뜨거웠던 여름 어느 날, 나는 곧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딸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낯선 이국땅으로 홀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비의 마음은 복잡했지만, 그보다 먼저 딸아이에게 한국인으로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뿌리와 역사의 자취를 눈과 마음에 새겨주고 싶었다.

그날 우리는 하루 온종일 시간을 내어 지하철을 타고, 또 서울의 복잡한 길을 함께 걸으며 돌아다녔다. 수많은 대화가 오갔고 날씨는 무더웠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평소에도 딸아이에게 입버릇처럼 자주 이야기하곤 했던 한 장소에 다다랐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였다. 나는 비록 이순신 장군에 대한 공부를 오래 해오고 있었지만 생가터를 찾아가 보겠다는 생각은 최근에 든 터라 딸과의 방문이 나에게도 처음이었다.

침몰하는 나라를 구한 구세주, 그러나 너무나도 초라한 흔적

나는 딸에게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곤 했다. 해전의 전체적인 규모나 서구 중심의 역사관 때문에 세계적인 해전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오롯이 지휘관 한 명의 역량만을 두고 본다면 이순신 장군은 세계 역사상 최고인 해군 장군이라고 말이다.

그분은 모진 박해와 외로움 속에서도 오직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셨던 분이다. 모두가 두려워 뒷걸음치던 명량의 그 좁은 바다에서도 절망에 빠진 부하들을 일으켜 세워 승리를 쟁취해 내지 않았던가. 세상에 많은 장군이 있지만 이순신 장군처럼 성웅이라는 말이 이렇게 적합한 장군이 또 있을까. 만약 이 분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진정 침몰하던 나라를 기적적으로 구한 구세주 같은 장군이다.

그러나 막상 딸아이의 손을 잡고 도착한 생가터의 모습은 아비로서, 그리고 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초라하기만 했다.

이순신 장군 생가터를 알리는 길가 초라한 비석
이순신 장군 생가터를 알리는 길가 안내석

길을 걷는 수많은 행인은 이곳이 침몰하는 나라를 구한 구세주이자 불세출의 영웅이 태어난 곳인지도 모른 채 무심히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도로변에 덩그러니 놓인 작은 돌비석만이 이곳이 역사적인 공간임을 외롭게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생가 위치는 『택당집(澤堂集)』이나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등 옛 사료를 통해 조선 시대 ‘건천동(乾川洞)’이었다는 사실만 확인된다고 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 일대다.

우리는 대로변의 표석을 지나 사료에 근거해 실제 생가터로 추정된다는 골목 안쪽의 주소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거대한 기념관은커녕, 어느 흔한 상가 빌딩의 기둥 벽면에 차가운 놋쇠 판 하나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이순신 장군 생가터를 알리는 건물 안내판
이순신 장군 생가터를 알리는 건물 안내판

빌딩 이름 밑에 조용히 자리 잡은 안내판에는 "많은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를 이곳으로 추정하여 안내판을 설치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변은 인쇄소와 상가들이 즐비한 바쁜 일상의 골목이었고, 그 좁은 틈바구니 속에서 장군의 흔적은 겨우 가쁜 숨을 쉬고 있는 듯 보였다.

서울시의 답변, 그리고 아비의 마음속에 남은 부끄러움

나중에 확인한 서울시의 입장은 명확했다. 사료를 통해 건천동이었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정확한 필지를 특정하기는 어렵기에, 판단이 힘든 점을 양해해 달라는 요지였다. 더 많은 시민이 찾아볼 수 있는 위치인 대로변에 표석을 설치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물론 행정적인 한계와 고증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아무리 실제 생가터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한들, 이 건천동 지역이 현재의 인현동 1가 일대인 것이 확실하다면, 이 주변에 사람들이 잠시 들러 장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차 한잔 마시며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기념관 정도는 마련해 둘 수 없는 것일까?

외국인들이 가득한 명동과 충무로가 코앞인데, 정작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 태어난 자리는 이토록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어야 하는지 서글프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먼 이국땅으로 떠나는 딸아이에게 우리 역사의 위대함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으나, 눈앞에 마주한 초라한 현실 앞에서 나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몰려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딸에게 그런 속마음을 차마 다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가슴속에는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얹어진 기분이었다.

"딸아, 비록 장군의 생가터는 이토록 좁고 초라한 골목길 벽면에 박혀 있지만, 그분이 지켜낸 이 나라는 결코 작지 않단다. 네가 독일에 가더라도, 이 초라한 골목길에서 태어나 나라를 구했던 그 위대한 성웅의 정신만큼은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잊지 말거라."

말없이 벽면의 안내판을 바라보던 딸아이의 옆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읊조릴 뿐이었다. 2020년의 그 뜨거웠던 여름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에 서글프고 부끄러운 흔적으로 남아 있다.

👉 [이순신 장군 그리고 나의 이야기] ② 독일에서 울린 신문고, 2005년 현충사 영문 페이지

몸철학 드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