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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이순신 장군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믿어 주었는가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을 써 오면서, 되풀이해서 눈에 띄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순신 장군을 만나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 만큼 믿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믿음이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다룬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이순신 장군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사람을 바꾸어 놓은 이순신 장군 싸움을 피하려던 사람이 가장 먼저 돌진하는 장수가 되고, 거짓 보고를 하던 사람이 충직한 부하가 되고, 겁을 먹고 물러서려던 사람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뛰어드는 장수가 됩니다. 이 연재에서 이미 소개해 드린 몇 사람만 떠올려도 그렇습니다. 이영남(李英男) 장군은 본래 원균의 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가까워지며 원균의 비리를 오히려 이순신 장군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끝내 노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김완(金浣) 장군은 첫 등장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순천 관내를 한 나절만에 "혼자서 수색했다"는 엉터리 보고로 일기에 처음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한산도대첩에서 왜적 열여섯 급의 전공을 세우며, 용장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안위(安衛) 장군은 칠천량 패전 직후에는 통곡만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명량대첩 당일, 이순신 장군의 불호령을 듣고서야 겨우 적진으로 돌입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날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나라를 지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호(申浩) 장군은 첫 출전을 앞두고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다"는 한탄스러운 평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뒤, 한산도대첩과 부산포대첩에서 가장 먼저 돌진하는 장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사람이 아니었던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힘과 권위로 조선 수군을 눌러 보려 했던 오만한 사람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인품 앞에서 결국 마음 깊이 그를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⑭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돌격장, 이언량 장군

이언량 장군은 누구인가? 이언량(李彦良) 장군은 자(字)가 충민(忠敏)이고, 아버지는 교수(敎授) 이수방(李秀芳)입니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으로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언량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의 군관으로 들어옵니다. 거북선 돌격장으로 1592년 4월 29일, 이순신 장군이 첫 출정을 앞두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 이언량 장군의 이름이 처음 등장합니다. "…돌격장에 영군관 이언량(李彦良)…" (장계, 1592년 4월 29일) 한 달 뒤인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이언량 장군은 거북선을 몰고 처음으로 실전에 나섭니다.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한 거북선을 이언량 장군과 이기남 장군이 맡았습니다. 그리고 9월 1일 부산포대첩에서는 아예 선봉에 섭니다. "…귀선돌격장 군관 이언량(李彦良)…이 다른 판옥선과 함께 적의 선봉 대선 4척을 격침했다…" (장계, 1592년 9월 초1일) 당시까지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왜선을 격침한 부산포대첩에서, 이언량 장군은 조선 수군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몰고 가장 앞에 있었습니다. 휴전 기간에도 거북선 곁을 지키다 이듬해인 1593년 2월 18일, 웅포해전에서 이언량 장군은 다시 이름을 남깁니다. "좌돌격귀선장 주부 이언량(李彦良) 등이, 궁지에 몰린 적선 세 척을 뒤쫓았다." (장계, 1593년 2월 18일) 이 웅포해전을 끝으로, 거북선은 더 이상 큰 싸움에 나서지 않습니다. 해전 금지령, 왜성 축조, 휴전 회담이 이어지며, 1593년부터 1596년까지 조선 수군에게는 큰 전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용한 시기의 일기 속에도 이언량 장군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이언량(龜船將)이 재목을 깎아 가지고 왔다." (난중일기, 1595년 9월 26일) "바람막이 세 개를 만들어서 걸었는데, 이언량(李彦良)과 김응겸(金應謙)이 감독했다." (난중일기, 1596년 3월 21일)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