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돌격장, 이언량 장군
이언량 장군은 누구인가?
이언량(李彦良) 장군은 자(字)가 충민(忠敏)이고, 아버지는 교수(敎授) 이수방(李秀芳)입니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으로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언량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의 군관으로 들어옵니다.
거북선 돌격장으로
1592년 4월 29일, 이순신 장군이 첫 출정을 앞두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 이언량 장군의 이름이 처음 등장합니다.
"…돌격장에 영군관 이언량(李彦良)…" (장계, 1592년 4월 29일)
한 달 뒤인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이언량 장군은 거북선을 몰고 처음으로 실전에 나섭니다.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한 거북선을 이언량 장군과 이기남 장군이 맡았습니다.
그리고 9월 1일 부산포대첩에서는 아예 선봉에 섭니다.
"…귀선돌격장 군관 이언량(李彦良)…이 다른 판옥선과 함께 적의 선봉 대선 4척을 격침했다…" (장계, 1592년 9월 초1일)
당시까지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왜선을 격침한 부산포대첩에서, 이언량 장군은 조선 수군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몰고 가장 앞에 있었습니다.
휴전 기간에도 거북선 곁을 지키다
이듬해인 1593년 2월 18일, 웅포해전에서 이언량 장군은 다시 이름을 남깁니다.
"좌돌격귀선장 주부 이언량(李彦良) 등이, 궁지에 몰린 적선 세 척을 뒤쫓았다." (장계, 1593년 2월 18일)
이 웅포해전을 끝으로, 거북선은 더 이상 큰 싸움에 나서지 않습니다. 해전 금지령, 왜성 축조, 휴전 회담이 이어지며, 1593년부터 1596년까지 조선 수군에게는 큰 전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용한 시기의 일기 속에도 이언량 장군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이언량(龜船將)이 재목을 깎아 가지고 왔다." (난중일기, 1595년 9월 26일)
"바람막이 세 개를 만들어서 걸었는데, 이언량(李彦良)과 김응겸(金應謙)이 감독했다." (난중일기, 1596년 3월 21일)
전투가 사라진 이 몇 해 동안에도, 이언량 장군은 여전히 "귀선장(龜船將)" — 거북선을 맡은 장수 — 이었습니다. 싸울 일이 없을 때는 배를 고치고 진영의 살림을 돌보며, 묵묵히 거북선 곁을 지켰습니다. 이후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 초계군수(草溪郡守·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부호군(副護軍)을 차례로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1596년 3월의 이 기록 이후, 1598년 노량대첩 이전까지 이언량 장군의 이름은 일기에도 장계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사이 조선 수군은 두 번의 큰 사건을 겪습니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거북선 다섯 척이 모두 침몰했고, 두 달 뒤 명량대첩에서는 거북선 없이 판옥선 열세 척으로 싸웠습니다. 이언량 장군이 이 두 전투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짐작해 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그는 초계군수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 무렵 이미 수군을 떠나 초계군수 같은 육상 관직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거북선과 함께 가라앉은 칠천량의 참패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북선이 없던 명량대첩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다만 이는 저의 추측일 뿐,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마지막 바다, 노량대첩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으로 나선 노량대첩에서 이언량 장군도 함께 싸웁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의 상황을, 도원수 권율이 조정에 이렇게 보고합니다.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孫文彧)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 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주사의 공이었습니다. 우치적(禹致績)·이섬(李暹)·우수(禹壽)·유형(柳珩)·이언량(李彦良)의 공이 우수하였고, 수공(首功)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였습니다." (선조실록)
이 보고문에 나오는 "이섬(李暹)"은 이언량 장군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에 함께 나가, 조정에 올라간 같은 보고서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언량 장군은 이 전투에서 명나라 도독 진린을 구하려다 전사했습니다. 아들 이섬 장군도 이 전투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두 분은 지금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 나란히 묻혀 있습니다.
뒤늦게 인정된 이언량 부자의 공
이언량 장군 부자의 공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포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군공청은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이기남·신여량·구덕령·라덕신·이극신·송전·이섬·위대기·조효남·선여경·이언량은 기존의 원신례(元愼例) 기준에 따라 포상해야 하며, 이전과 달리 앞뒤가 달라서 억울함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선조실록)
비변사와 임금의 전령이 몇 차례 오간 끝에야, 이언량 장군 부자는 원신례 기준에 따라 정당하게 포상받습니다. 이 논의를 지켜본 사관(史臣)은 당시 포상 제도의 문제를 이렇게 비판합니다.
"공적에는 선후와 경중이 있다. …그러나 실제 포상 과정에서는, 사적 친분, 뇌물, 옛 인연, 개인적 감정에 따라 공적이 임의로 평가되었다. …전쟁 시 성과를 놓고 문신이 대신하거나, 심지어 사람을 고발·처형하여 공적을 챙기는 사례도 있었다. …무력으로 공을 세운 장수들이 오히려 배제되거나 문신이 공적을 챙기는 일이 발생했다." (선조실록)
목숨을 바쳐 세운 전공마저, 이렇게 형평성 다툼 속에서 하마터면 늦어지거나 묻힐 뻔했습니다. 이언량 장군은 사후 통정대부(通政大夫)·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고, 아들 이섬 장군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에 훈록되어, 경상도 울산 충의사(忠義祠)에 배향되었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언량 장군은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 중 한 사람입니다. 사천과 부산포에서 앞장서 싸웠고, 큰 싸움이 사라진 3년의 휴전 기간에도 거북선 돌격장으로 자리를 지켰고, 마지막 노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를 하였습니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⑮ 이순신 장군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믿어 주었는가
몸철학 드림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