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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이순신 장군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믿어 주었는가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을 써 오면서, 되풀이해서 눈에 띄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순신 장군을 만나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 만큼 믿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믿음이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다룬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이순신 장군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사람을 바꾸어 놓은 이순신 장군 싸움을 피하려던 사람이 가장 먼저 돌진하는 장수가 되고, 거짓 보고를 하던 사람이 충직한 부하가 되고, 겁을 먹고 물러서려던 사람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뛰어드는 장수가 됩니다. 이 연재에서 이미 소개해 드린 몇 사람만 떠올려도 그렇습니다. 이영남(李英男) 장군은 본래 원균의 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가까워지며 원균의 비리를 오히려 이순신 장군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끝내 노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김완(金浣) 장군은 첫 등장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순천 관내를 한 나절만에 "혼자서 수색했다"는 엉터리 보고로 일기에 처음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한산도대첩에서 왜적 열여섯 급의 전공을 세우며, 용장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안위(安衛) 장군은 칠천량 패전 직후에는 통곡만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명량대첩 당일, 이순신 장군의 불호령을 듣고서야 겨우 적진으로 돌입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날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나라를 지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호(申浩) 장군은 첫 출전을 앞두고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다"는 한탄스러운 평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뒤, 한산도대첩과 부산포대첩에서 가장 먼저 돌진하는 장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사람이 아니었던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힘과 권위로 조선 수군을 눌러 보려 했던 오만한 사람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인품 앞에서 결국 마음 깊이 그를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⑧ 이순신 장군의 작전참모이자 물길잡이, 어영담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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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담은 누구인가? 어영담(魚泳潭, 1532~1594) 장군은 경상남도 함안에서, 내금위 소속 하급 무관 어심(魚深)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함종(咸從). 무예와 담력을 인정받아 일찍이 여도진 수군만호에 특채됐고, 1564년(명종 19) 식년무과에도 급제했습니다. 이후 진해 등 여러 진관의 막료로 있으면서 남해 물길을 익혔고,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광양현감(光陽縣監)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보다 열세 살 많습니다. 물길을 아는 사람 이순신 장군은 진을 편성할 때마다 어영담 장군에게 함대의 중심인 중부장(中部將)을 맡겼습니다. 그가 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는지,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직접 밝혔습니다. 물길전문가 광양현감 어영담 자료집 "경상도와 전라도에 여러 번 근무하여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어영담은 생각함이 뛰어난 사람으로 신이 중부장으로 정해 전략을 함께 세웠고, 전투에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므로 호남 한쪽이 이제까지 보완하게 된 것은 실로 어영담의 일부분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장초, 1593년 4월 8일) 1592년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는 직접 왜장을 사살해 배로 묶어 왔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광양현감 어영담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한산도대첩 장계, 1592년 7월 8일) 같은 해 9월 11일, 이순신 장군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했다"고 조정에 밝힌 다섯 장수(권준·이순신(李純信)·어영담·배흥립·정운)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두 번 파직되고, 두 번 돌아오다 어영담 장군에게도 억울한 일이 있었습니다. 1593년, 창고에 장부보다 600여 석 많은 양곡이 쌓여 있다는 이유로 파직됐습니다. 실은 흉년과 전란에 대비해 미리 비축해 둔 군량·구휼미였습니다. 광양현 백성 126명이 연명하여 그를 변호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