⑰ 조정에서 장군을 변호한 사람, 이원익
지난 글에서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1597년, 장군이 공격받을 때 "오직 우의정 이원익만이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요.
이번 글의 주인공은 그 이원익입니다.
이원익은 조선의 이름난 청백리입니다. 영의정을 다섯 번 지냈지만 집은 두어 칸 초가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이원익은 이순신 장군을 끝까지 감싼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난중일기를 날짜순으로 따라가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이원익을 비웃은 날도 있었습니다.
이원익은 어떻게 장군을 변호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595년부터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1597년까지를 기록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1595년 8월, 진주에서 처음 만나다
1595년, 이원익은 우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했습니다. 도체찰사는 전쟁 중에 임금을 대신해 여러 도의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는 자리입니다. 이순신 장군보다 두 살 아래였습니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각주)
그해 8월, 이원익이 진주에 와서 장군을 불렀습니다.
"체찰사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에 백성을 위해서 고통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났다." (난중일기 을미년 8월 23일)
수백 장의 소장을 한자리에서 처리하다
일기에는 적히지 않은 이야기가 행록에 남아 있습니다. 행록은 장군의 조카 이분이 쓴 전기입니다.
이원익이 호남을 지날 때, 수군들이 올린 소장이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원익은 이를 일부러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말아서 싣고 진주로 왔습니다. 그리고 장군 앞에 쌓아 놓았습니다.
"공은 오른손에 붓을 쥐고 왼손으로는 종이를 끌어당기며 판단하고 결재하기를 마치 물 흐르듯 하여 잠깐 사이에 모두 마쳤다. 정승과 부체찰사가 그것들을 가져다보니 모두 다 사리에 합당하였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이원익이 놀라 어떻게 이렇게 능수능란하냐고 묻자, 장군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수군에 관계된 일이므로 늘 보고 듣고 해서 익숙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이원익은 장군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소문이 아니라 일로 사람을 보려 한 것입니다.
"군사 5480명에게 밥을 먹였다"
8월 25일, 이원익 일행은 장군의 배에 함께 올라 한산도로 갔습니다. 종일 섬과 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흩어진 작은 진들을 어떻게 합칠지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일기에는 이렇게 짧게 적혀 있습니다.
"군사 5480 명에게 밥을 먹였다." (난중일기 을미년 8월 27일)
이 한 줄 뒤에 숨은 이야기가 행록에 있습니다.
이원익이 돌아가려 할 때 장군이 청했습니다. 군사들은 정승이 왔으니 잔치와 상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실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원익은 미리 준비해 오지 못했다고 난처해했습니다. 그러자 장군이 말했습니다.
"내가 정승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 정승께서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마땅히 정승의 분부로 잔치를 열겠습니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장군은 잔치를 미리 준비해 두고, 그 공을 이원익에게 돌렸습니다. 군사들은 정승이 베푼 잔치로 알았을 것입니다.
훗날 이원익은 인조 앞에서 이 일을 직접 회고했습니다. 소를 30여 마리 잡아 군사들을 먹였다고 했습니다. 인조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모는 진정한 장군이었구나. 그 마음과 지혜도 또한 칭찬할 만하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오리집』 인용 부분)
일기에는 "밥을 먹였다" 한 줄뿐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자기 일기에도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다.
1596년 봄, "알맹이가 없단 말인가"
여기까지만 보면 두 사람은 처음부터 마음이 잘 맞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봄, 일기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1596년 2월, 체찰사의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전라우도의 수군이 전라좌도와 우도를 오가며 제주와 진도를 지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습다. 조정에서 꾀하는 정책이 이럴 수가 있나! 체찰사가 꾀를 내는 것이 이렇게도 알맹이가 없단 말인가! 나라의 일이 이러하니 어찌할꼬!" (난중일기 병신년 2월 28일)
이틀 뒤 장군은 체찰사에게 보고문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 보고문에 무엇을 썼는지는 일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열흘 남짓 지나 체찰사의 회답이 왔습니다.
"그 회답에 우도의 수군을 합하여 본도로 보내라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우습다." (난중일기 병신년 3월 12일)
그리고 3월 26일, 체찰사의 전령이 또 왔습니다.
"'전일(12일)에 우도의 수군을 돌려 보내라고 한 것은 회계(回啓)를 잘못 본 탓이다.' 고 하였다. 우습다." (난중일기 병신년 3월 26일)
명령이 내려오고, 본의가 아니라는 회답이 오고, 다시 문서를 잘못 본 탓이라는 전령이 왔습니다. 장군은 그때마다 "우습다"고 적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원익은 장군을 알아준 사람입니다. 그 이원익을 향해서도 장군은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일이 잘못되면 잘못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이순신 기록을 다시 읽다」 ㉚편에서 초고본의 장군이 얼마나 날카로운 사람이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날카로움은 원균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관련 글 바로가기 ㉚ 난중일기 초고본과 전서본의 차이
1596년 가을, 두 달을 함께 다니다
그해 가을,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다닙니다.
윤8월부터 9월까지, 장군은 체찰사의 전라도 순시에 동행했습니다. 하동의 두치에서 시작해 광양, 순천, 녹도, 진도, 우수영, 무안, 무장, 장성으로 이어진 길이었습니다.
"떠나서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의 둔전을 살펴 보았다. 체찰사는 매우 기뻐하는 빛이 많았다." (난중일기 병신년 윤8월 19일)
"일찍 떠나 배를 타고 체찰사와 부찰사와 함께 같이 앉아 종일 군사 일을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병신년 윤8월 20일)
장군이 백성을 모아 일군 둔전을 이원익이 직접 본 것입니다.
선조 앞에서 한 첫 번째 변호
순시를 마치고 한 달쯤 뒤인 1596년 10월 5일, 이원익은 선조를 만났습니다. 선조가 물었습니다.
선조: "당초에는 왜적들을 부지런히 사로잡았다던데, 그후에 들으니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어떠하던가?"
이원익: "소신의 소견으로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처음과는 달리 태만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선조: "절제(節制)할 만한 재질이 있던가?"
이원익: "소신의 생각으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선조실록 29년 10월 5일)
선조는 이미 장군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이원익은 자기가 두 눈으로 본 것을 말했습니다.
이원익은 봄에 장군이 자기를 두고 쓴 일기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았다 해도 대답은 같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원익이 본 것은 장군의 말이 아니라 장군이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597년, 홀로 변호한 사람
해가 바뀌어 1597년 초, 장군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조정의 논의는 장군을 탓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류성룡은 그때의 조정을 『징비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순신을 처음 추천한 것은 나였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원균과 합세하여 이순신을 공격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오직 우의정 이원익만이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또 말하였다. '이순신과 원균은 각기 나누어 지키는 지역이 있어서 처음에 곧장 진격하지 않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징비록』 권2)
'오직'이라는 말에 그때 이원익이 서 있던 자리가 보입니다. 영남에 있던 이원익은 급히 임금께 글도 올렸습니다.
"왜적들이 꺼리는 것은 수군입니다. 이모를 바꾸어서는 안 되고, 원균을 보내서도 안 됩니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조정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원익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나라의 일도 다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구나."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소복을 입고 맞이하다
장군은 고문을 받고 풀려나 백의종군 길에 올랐습니다. 그 길에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 관련 글 바로가기 ③ 백의종군 길에 마주한 어머니의 죽음
5월, 장군이 구례에 머물 때 체찰사가 구례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장군은 성 안에 머물기가 미안하다며 성 밖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난중일기 정유년 5월 19일) 그러자 이원익이 먼저 사람을 보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었습니다.
"체찰사가 내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공생을 보내고 또 군관 이지각을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또 군관을 보내어 조문하기를, '일찍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듣고 놀라 애도한다.' 고 하고, 저녁에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난중일기 정유년 5월 20일)
"어둘 무렵에 가서 뵈오니,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접대한다." (난중일기 정유년 5월 20일)
도체찰사가 소복을 입고 백의종군하는 죄인을 맞았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사람에 대한 예를 갖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이야기했습니다.
사흘 뒤에도 이원익은 장군을 불렀습니다.
"체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부르므로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하는데, 시국의 그릇된 일에 대하여 많이 분개하고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5월 23일)
다음 날에는 경상우도 연해안 지도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장군은 거절할 수 없어서 대강 그려 보냈다고 적었습니다. (난중일기 정유년 5월 24일) 벼슬을 빼앗긴 사람에게 바다를 묻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칠천량 이틀 전의 꿈
1597년 7월 14일, 장군은 이상한 꿈을 꿉니다.
"새벽 꿈에 나는 체찰사와 같이 어느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쫙 깔려 있었는데 혹은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게도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
이틀 뒤인 7월 16일,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무너졌습니다.
👉 관련 글 바로가기 ⑤ 칠천량의 치욕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이원익은 무엇을 보고 변호했나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이원익은 한산도의 잔치 이야기를 하면서 거듭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 통제사는 참으로 큰 인물이었다."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읽으며 제가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이원익은 소문으로 장군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소장을 쌓아 놓고 시험했고, 둔전을 직접 보았고, 두 달을 함께 다녔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장군을 의심할 때 본 대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조정이 모두 장군을 탓할 때도 홀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원익의 변호는 두 눈으로 본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장군이 죄인으로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이원익은 소복을 입고 장군을 맞았습니다.
장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군은 이원익의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일기에 "알맹이가 없다"고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원익 앞에서는 그를 세워 주었습니다. 자기가 준비한 잔치를 정승의 이름으로 열었습니다. 속으로 판단하는 일과 겉으로 지키는 도리를 따로 두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해서만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한 일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원익의 변호에도 장군은 끝내 옥에 갇혔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옥에 갇힌 장군을 살려낸 사람, 정탁을 만나 보겠습니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⑱ 조정에서 장군을 지킨 사람, 정탁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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