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싸움에 소극적인 사람이 용장이 되다, 신호 장군
신호 장군은 누구인가?
신호(申浩) 장군은 본관이 평산(平山)이고, 자는 언심(彦深)입니다. 1539년에 태어났으니, 이순신 장군보다 여섯 살 위이고, 무과 급제도 아홉 해 앞섰습니다.
1567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등 북방의 여러 외직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낙안군수로 남쪽에 부임합니다.
1차 출동에 소극적이었던 첫 등장
신호 장군은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낙안군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함대 편성에서 좌부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난중일기 속 그의 첫 등장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낙안군수(신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난중일기, 1592년 5월 2일)
출정을 앞둔 자리에서 유독 소극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이 날은 1차 출동(옥포·합포·적진포)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이어진 2차 출동(사천·당포·당항포·율포)까지도, 신호 장군의 이름은 따로 일기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두 달 만의 변화, 한산도와 부산포
그런데 3차 출동, 한산도 앞바다에서 신호 장군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낙안군수 신호(申浩)는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난중일기, 1592년 7월 초8일 · 한산도대첩)
두 달 뒤 부산포에서는 아예 선봉에 섭니다.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申浩) 등이 먼저 곧바로 돌진하여 선봉 왜 대선 네 척을 깨부수니…" (난중일기, 1592년 9월 초1일 · 부산포대첩)
싸움을 피하려는 뜻을 보였다던 사람이, 불과 두 달 만에 두 대첩에서 가장 먼저 돌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거짓 보고로 시작했던 김완 장군이 용장으로 거듭나고, 비겁함을 보였던 안위 장군이 용기로 돌아섰던 것과 꼭 닮은 변화입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일기는 그 답을 직접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1차·2차 출동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옥포·사천·당포·당항포에서 잇달아 거둔 승리를 두 달 내내 곁에서 지켜보고, 싸우면 이긴다는 확신과 동료 장수들의 용맹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후 신호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진영에서 꾸준히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 됩니다. 계사년(1593) 내내 다른 장수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한가위를 함께 쇠고, 정보를 주고받는 사람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다 갑오년(1594) 2월, 신호 장군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암행어사 류몽인이 조정에 올린 비밀 장계에, 신호 장군을 포함한 네 수령을 파면하라는 건의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 초안을 전해 듣고 일기에 이렇게 적습니다.
"흥양이 암행어사(柳夢寅)의 비밀 장계초안을 가져 왔는데 임실현감 이몽상∙무장현감 이충길∙영암군수 김성헌∙낙안군수 신호(申浩)를 파면하고, 순천에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를 논난하고, 나머지 수령의 악행은 덮어 주고 포상하도록 상신한다." (난중일기, 1594년 2월 16일)
여기서 '논난(論難)'은 오늘날 '논란'의 옛말로, 누군가의 잘못을 따져 준엄하게 책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순천'은 당시 순천부사였던 권준 장군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류몽인의 이 장계 초안은, 신호 장군을 포함한 네 수령을 파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권준 장군까지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로 지목해 가장 무겁게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반응은 격했습니다.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 암행어사 류몽인은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눈앞의 임시 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말만 듣고서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무목에 대한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여 심히 통탄할 일이다." (난중일기, 1594년 2월 16일)
악무목은 남송의 명장 악비(岳飛)의 시호이고, 진회(秦檜)는 그런 악비를 모함해 죽음으로 몰아넣은 간신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일기에서 이 정도로 무거운 역사적 비유를 쓴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근거 없는 소문만으로 유능한 수령을 파면하려는 조정의 행태를, 충신을 모함해 죽인 간신의 짓거리에 빗댄 것입니다. 신호 장군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굳건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이 격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신호 장군은 결국 그해 안에 낙안군수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25일 일기에는 그가 "전 낙안군수 첨지"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전 낙안군수 첨지 신호(申浩)가 와서, 체찰사(윤두수)의 공문∙목화∙벙거지 및 정목(正木) 한 동을 가지고 왔다. 그와 같이 이야기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난중일기, 1594년 10월 25일)
관직은 잃었지만, 진영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이영남 장군, 이정충 장군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순신 장군과 작별의 술잔을 나누고,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아들 회(薈)를 딸려 본영까지 데려다주는 일까지 맡습니다. 관직 없이 첨지 신분으로 지내던 그 몇 달 동안도, 그는 여전히 이 진영의 사람이었습니다.
첨지에서 다시 조방장으로
그리고 이듬해 을미년(1595) 2월, 신호 장군은 조방장으로 돌아옵니다.
"조방장 신호(申浩)가 진에 이르러, 교서에 숙배하고서 함께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1595년 2월 16일)
이때부터 신호 장군은 다시 이순신 장군의 일상 곁으로 돌아옵니다. 원균의 행실을 함께 전해 듣고, 둔전 일을 의논하고, 활쏘기 편을 갈라 겨루고 이겼다는 소소한 기록까지 남습니다. 그해 8월에는 이순신 장군이 그에게 직접 편지를 씁니다.
"경수(이억기의 字)∙권언경(權彦卿)∙자윤(박종남의 字)∙언심(신호의 字)에게 편지를 썼다." (난중일기, 1595년 8월 21일)
공교롭게도 신호 장군의 이 파직과 복직 이력은, 이 연재에서 다뤘던 권준∙이순신(李純信)∙배흥립∙어영담 네 장수가 겪은 파직-복직의 시련과 꼭 닮아 있습니다. 이 시기 이순신 장군 곁의 장수들이 얼마나 비슷한 굴곡을 함께 겪었는지, 신호 장군의 이야기를 보며 다시 한번 느낍니다.
병으로 돌아간 뒤, 남원성에서
병신년(1596) 4월, 난중일기에서 신호 장군의 이름은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조방장 신호(申浩)는 병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난중일기, 1596년 4월 21일)
이후 난중일기에는 신호 장군의 이름이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다른 기록에 있습니다. 정유재란이 터진 1597년, 신호 장군은 교룡산성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를 맡아 남원성 방어에 나섰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해 8월, 조명연합군이 남원성 전투에서 패하던 그 자리에서 전사했습니다. 사후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형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무장(武壯)입니다.
글을 마치며
신호 장군의 이야기에는 두 번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이던 사람이 불과 두 달 만에 가장 먼저 돌진하는 장수로 바뀐 순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얻은 용기를 근거 없는 모함으로 잃을 뻔했을 때, 이순신 장군이 그를 위해 목소리를 낸 순간입니다.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이순신 장군이 일기에 좀처럼 쓰지 않는 무거운 말로 말입니다.
김완 장군과 안위 장군이 이순신 장군을 만나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신호 장군은 그렇게 바뀐 사람을 이순신 장군이 끝까지 지켜준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과, 그렇게 변화된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할 때 등을 돌리지 않고 지켜주는 것. 두 가지 모두 이순신 장군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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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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