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원균의 부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을 진심으로 따른 사람, 이영남 장군
이영남 장군은 누구인가?
이영남(李英男) 장군은 본관이 양성(陽城)이고, 자는 사수(士秀)입니다. 1563년, 충청도 진천현(지금의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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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남 장군 |
1584년(선조 17), 22세의 나이로 별시 무과에 병과 163위로 급제했습니다. 급제 이후 8년 가까이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무렵에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휘하의 소비포권관(蘇非浦權管)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소비포는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 지역 포구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원균 사이에서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잇달아 함락시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선을 스스로 침몰시키고 육지로 달아나려 했습니다. 이때 이를 만류한 것이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 등이었습니다. 이운룡 장군은 원균에게, 전쟁이 끝난 뒤 조정이 책임을 물을 것이니 싸우다 물러나도 늦지 않다고 설득하며, 전라좌수영에 원병을 청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때 그 임무, 곧 청병사절(請兵使節)로 나선 것이 소비포권관 이영남 장군이었습니다. 처음에 이순신 장군과 전라좌수영 장수들은 관할 경계가 다르고, 조정의 허락 없이 다른 지역으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로 출정을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영남 장군이 거듭 찾아와 요청하였고, 전라좌수군은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 7일, 임진왜란 첫 승리인 옥포해전이 만들어집니다.
원균 밑에서 이순신 장군을 따르다
이영남 장군이 난중일기에 처음 이름을 남기는 날은 1593년 2월 7일입니다.
"기숙흠(奇叔欽)도 와서 보고, 이영남(李英男)∙이여염(李汝恬)도 왔다." (난중일기, 1593년 2월 7일)
그 뒤로 이영남 장군은 원균 휘하에 있으면서도, 여러 차례 이순신 장군을 직접 찾아와 원균의 행실을 전합니다. 1593년 3월 2일 기록입니다.
"이영남(李英男)∙이여염이 와서 원균 영감의 비리를 들으니, 더욱더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난중일기, 1593년 3월 2일)
두 달여 뒤인 5월 8일에도 비슷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보고, 수사(원균)의 망녕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했다." (난중일기, 1593년 5월 8일)
이 기록들은 모두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는 1593년 9월 12일 전의 일입니다. 즉 이영남 장군은 원균의 부하 장수이면서 이순신 장군을 더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듬해인 1594년 1월, 조선은 이른바 "계갑대기근"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영남 장군은 이 참혹한 상황을 이순신 장군에게 전합니다.
"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 및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난중일기, 1594년 1월 19일)
그해 8월 18일 기록을 보면, 이영남 장군의 신뢰가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 한번 뚜렷이 드러납니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은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 곤양군수(이광악)∙거제현령(안위)∙소비포권관(이영남) 등과 함께 배를 돌려 삼천포 앞에 이르러 잤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18일)
원균이 술에 취해 자리를 비운 그 밤, 이순신 장군 곁을 지킨 것은 다름 아닌 원균의 부하 소비포권관 이영남이었습니다.
강계로,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1595년 4월 20일, 난중일기에는 "이영남이 장계 회답을 가지고 내려왔다"는 짧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연말까지, 이영남 장군의 이름은 한동안 일기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이영남 장군은 1595년 7월부터 12월까지 약 6개월간, 경상도 바다를 떠나 평안도 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으로 근무했다고 합니다. 남쪽 바다에서 한창 싸우던 장수가 갑자기 북방 내륙 고을의 행정관으로 옮겨 간 것인데, 정확한 사연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기간이 난중일기 속 공백과 시기적으로 겹치는 것은 분명합니다.
강계에서의 임기를 마친 이영남 장군은 다시 남쪽 수군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596년 1월, 다시 난중일기에 이름이 나타납니다.
몸져누운 이순신 장군의 곁에서
1596년 5월, 이순신 장군은 크게 앓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구토를 거듭하고, 밤이면 끙끙 앓았다고 일기에 적을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이영남 장군이 찾아옵니다. 5월 7일 밤의 기록입니다.
"앉아서 밤새도록 걱정하고 있을 적에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열고서 물어보니, 이영남(李英男)이 들어왔다. 불러 들여 조용히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1596년 5월 7일)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이영남 장군은 곁에 머뭅니다.
"아침에 이영남(李英男)과 함께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1596년 5월 8일) 같은 날 일기에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두 번이나 구토했다"는 기록이 따로 남아 있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이영남과 함께 서관(西關: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을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1596년 5월 9일)
먼 지방의 정세까지 밤늦게 조용히 나눌 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격식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닷새 넘게 머물던 이영남 장군은, 5월 12일이 되어서야 돌아갑니다.
"이영남(李英男)이 돌아갔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난중일기, 1596년 5월 12일)
그리고 이 날을 마지막으로, 난중일기에서 이영남 장군의 이름은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원균에게 배척되다, 그리고 가리포첨사로
1597년 2월,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자, 이영남 장군도 원균에게 배척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정확히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해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함대는 궤멸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억기 장군을 비롯해 오래도록 신뢰하던 장수들을 이 전투에서 잃었습니다. 그리고 8월,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자, 이영남 장군도 함께 전쟁터로 돌아옵니다. 그 뒤 어느 시점엔가 이영남 장군은 가리포진(지금의 완도)의 첨사 겸 조방장으로 임명되는데, 이 인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뜻이 반영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믿을 수 있는 장수를 여럿 잃은 상황에서, 함께 싸워 본 이영남 장군을 다시 곁에 둔 것입니다.
노량, 마지막 전투
1598년 11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이어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투를 치릅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장군도 이 전투에 참전해, 끝까지 싸우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적의 탄환에 맞아 서른여섯의 나이로 전사했습니다.
진천의 연리목
이영남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종이 시신을 수습해 고향 진천으로 돌아와 묘소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에 있는 이 묘소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묘소 곁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한 몸으로 붙어 자란 연리목이 있습니다. 소나무는 이영남 장군, 상수리나무는 이순신 장군의 환생이라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해져 옵니다.
1621년(광해군 13), 조정은 이영남 장군에게 병조참판을 추증했습니다. 그보다 앞선 1605년(선조 38)에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두 이영남 이야기
사실 노량에서 전사한 "이영남"에 대해서는, 전라도 전주(완주)의 전의이씨 집안도 자기 조상이라고 따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쪽 전승은 생년을 1571년, 무과 급제를 열여덟 되던 해(약 1589년)로 적고, 관직도 율포만호∙가덕진첨사로 다르게 전합니다. 최근에는 1807년(순조 7) 조정이 전주 이영남에게 병조판서를 추증했다는 교지가 전주역사박물관에 기증되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진천 쪽 전승을 따랐습니다. 난중일기에 거듭 나오는 "소비포권관 이영남"이라는 원문 기록이, 진천 쪽 인적사항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치며
이영남 장군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도망치려던 원균을 대신해 이순신 장군에게 출정을 청했습니다. 그 뒤로도 원균의 비리를 이순신 장군에게 전하는 사람이었고, 대기근의 참혹함을 알린 사람이었고, 이순신 장군이 몸져누웠을 때 밤늦도록 곁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량, 마지막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이영남 장군은 비록 원균의 부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을 진심으로 따른, 이순신 장군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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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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