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부산포대첩과 웅포해전

부산포대첩, 적의 심장을 두드리다

1592년 9월 1일. 이순신은 부산포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도 싸움이 있었습니다. 화준구미에서 왜선 다섯 척, 다대포에서 여덟 척, 서평포에서 아홉 척, 절영도에서 두 척. 모두 불태웠습니다.

부산포에 도착하니 적선 470여 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곧장 돌진했습니다.
녹도만호 정운 장군이 선봉에 섰습니다. 적선 네 척을 먼저 부수고, 뒤따르던 배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몰아쳤습니다.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총과 화살을 쏘았습니다. 하루 종일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까지, 적선 100여 척이 부서졌습니다.
부산포대첩은 이순신 장군 스스로가 장계에서도 밝혔듯이 그때까지 이룬 전공 중에서 가장 큰 전공이었습니다.

다만, 가슴 아픈 일은 좁은 포구를 장사진으로 돌격하는 과정에서 선봉에 서서 용감히 싸우던 정운 장군이 총탄에 맞아 전사 하였습니다.

이순신은 훗날 장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아주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하다."
(정운 장군에 대해서는 추후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 편에서 별도로 다룰 예정입니다.)

웅포해전, 깊은 포구에 숨은 왜선들

한산도대첩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부산포대첩이 1592년 임진년의 마지막 전투를 장식하였다면, 웅포해전은 1593년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첫 전투였습니다.

부산포대첩 때 부산왜성은 그해 4월부터 짓기 시작해 아직 기초 단계였습니다. 완성된 성곽은 없었고, 적은 산기슭에 의지해 응사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하루 만에 적선 100여척을 침몰시킬 수 있었습니다.

1593년 2월 10일, 이순신 장군은 웅천 앞바다에 이르렀습니다.

그 고을에 주둔한 적은 배를 깊은 포구에 숨기고, 포구 어귀에 험한 곳을 골라 소굴을 여러 개 만들어 놓은 채,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싸우고 싶지 않은 적과의 싸움

2월 10일,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적선이 줄지어 정박했는데, 두 번이나 유인했으나, 진작부터 우리 수군을 겁내어 나올 듯하다가도 돌아가 버리므로, 끝내 잡아 없애지 못하였다. 참으로 분하다."

2월 12일, 다시 시도했습니다. 결과는 같았습니다.

"나아갔다 물러갔다하며 유인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뒤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하니, 어찌할꼬! 너무도 분하다."

2월 18일, 방법을 바꿨습니다. 복병을 매복시켜 적선 열 척을 끌어냈습니다. 실제 교전이 벌어졌고, "왜적의 죽은 자의 수효를 알 수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2월 22일, 승려 의병까지 동원했습니다. 상륙하는 척 유인해 적을 흔들었습니다. 다만 조선 배 몇 척이 명령 없이 돌진하다 좌초되어 공격받았습니다.

3월 6일, 다시 웅천을 쳤습니다. 적을 육지로 몰아붙였습니다.

"관군이 철환과 편전을 비 오듯 마구 쏘니, 죽는 자가 무척 많았다."

1593년 5월 본격적으로 남해안에 왜성을 쌓기 시작하다

한산도대첩 이후 적은 정면으로 나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의 명령이었습니다.
부산포에서는 470여척이나 되는 적선이 미비한 방어시설에 의지할 뿐이었습니다.
웅포에서 적은 배를 깊은 포구에 숨긴 채 나와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인, 매복 작전을 쓰고 육지에 상륙하여 적을 바다로 몰아붙이는 전술까지 동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다로 나온 적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왜적은 웅포해전 이후 1593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남해안에 왜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적은 왜성에 숨어 아예 나오려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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