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거북선을 제조한 감조군관, 나대용 장군
1591년 이전 이력
나대용 장군은 본관이 금성(錦城)이고,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입니다.
1556년(명종 11), 전라도 나주(지금의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서 첨추 나항(羅亢)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순신 장군보다 열한 살 아래입니다.
1583년(선조 16), 스물여덟의 나이로 훈련원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선조실록』에는 그가 급제한 뒤 "등과해 6년 동안은 북쪽을 방어했고"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북방에서 먼저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은 셈입니다.
1591년 이순신 장군의 감조군관이 되다
나대용 장군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1591년(신묘년)에 찾아옵니다.
그의 행장인 『체암선생행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대용은 신묘년(1591년)에 충무공이 본도(전라도) 좌수영에 있을 때 주부로서 집에 있다가 장차 왜적이 침략해 올 것으로 알고 사촌 아우 치용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가 방어를 준비하는 계책을 깊이 말하자, 충무공은 크게 기뻐하며 막하에 머물게 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나대용 장군을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이하 감조군관) — 풀어 쓰면 '전선을 감독해 만들고, 군병과 물자의 출납을 맡는 군관' — 으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전쟁이 터지기 불과 1년 전, 나대용 장군은 이렇게 이순신 장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대용 장군은 감조군관이 되기 이전에 이미 전선을 건조하는 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북선은 당시 판옥선에 지붕을 씌우고 그 지붕 위에 뾰족한 못을 박아 왜적이 배 위에 등선하는 것을 막은 배입니다. 이 배는 왜적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배입니다. 왜적의 강점은 무력화시키고 조선 수군의 강점은 극대화시킨 이 배를 이순신 장군이 처음 생각을 한 것인지 나대용 장군이 처음 생각을 한 것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대용 장군이 감조군관으로서 거북선 제작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의 개념을 나대용 장군에게 지시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나대용 장군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대용 장군을 거북선의 발명자라고 말하는 대신, 거북선의 감조군관으로 칭하고자 합니다.
![]() |
| 나대용 장군 영정 |
나대용 장군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거북선을 제조한 감조군관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고,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영예로운 것이 아닐까요?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에 화포를 장착하고 마지막 화포 발사 시험을 합니다. 나대용 장군은 실무 책임자로서 임진왜란 직전까지 거북선을 제조 및 시험하느라 무척 바빴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1592년 4월 18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의 난중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발포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대리(假將)를 정하여 보내라... 그래서 군관 나대용(羅大用)을 이 날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발포진의 지휘관 자리가 비자, 이순신 장군은 나대용 장군을 그 자리에 임시로 세웁니다.
옥포해전(5월 7일)을 불과 스무날 앞둔 시점입니다.
그리고 나대용 장군은 옥포해전에서 발포 가장(假將)으로 앞장서 돌격해 적선 두 척을 포획하는 공을 세웁니다.
사천해전, 이순신 장군과 나란히 맞은 총탄
1592년(임진년) 5월 29일, 조선 수군은 사천 선창에 정박한 왜선을 향해 나아갑니다. 왜군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 산 위에 진을 치고, 그 아래 배를 매어 둔 채 항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독려해 화살과 총포를 퍼부었고,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열세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립니다.
그런데 이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싸움에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이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아 등을 관통당한 그 유명한 부상이, 나대용 장군이 총탄에 맞은 것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날의 부상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상은 아니었다"고 짧게 적었지만, 실제로는 큰 부상이었고 일 년이 지난 후에도 부상의 후유증으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나대용 장군의 부상도 어느 정도였는지 당시 기록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나대용 장군 역시 이 날을 비롯해 전장에서 입은 부상이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나대용 장군은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도대첩, 그리고 명량대첩과 노량대첩까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대용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까지 함께 전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새로운 배를 만들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나대용 장군은 배 만드는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1606년에는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적이 배 위로 뛰어오르지 못하게 만든 창선(鎗船)을 개발합니다. 적은 인원(마흔두 명)으로도 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배였습니다. 1610년, 남해현령으로 있으면서는 해추선(海鰌船)이라는 쾌속선을 고안해 세 척을 건조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나대용 장군의 관직 생활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강진현감으로 있다가 파직되었고, 이어 맡은 금구·능성현령 가운데 능성에서도 다시 파직되었습니다. 이후 곤양현령과 남해현령으로 있을 때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는데, 지나친 음주가 그 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 다소 아쉬운 부분입니다.
1611년, 나대용 장군은 정3품 교동수사에 제수됩니다. 그러나 부임하지 못했습니다.
옛 전장에서 입었던 부상이 재발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결국 나대용 장군은 이듬해인 1612년 1월 29일,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나대용 장군을 기억하며
나대용 장군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는 그의 생가와 묘소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1977년 전라남도(현 나주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고, 1978년에는 이곳에 그를 기리는 사당 소충사(昭忠祠)가 세워졌습니다.
1999년에서 2000년 무렵, 해군은 장보고급 잠수함 한 척에 그의 이름을 붙여 나대용함(SS-069)으로 명명했습니다. 총탄을 무릅쓰고 바다에서 싸웠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더 나은 배를 만드는 데 생을 바쳤던 사람의 이름이, 지금도 남해 바다를 지키는 잠수함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⑤ 이순신 장군의 중위장이자 친한 벗, 권준 장군
몸철학 드림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