㉒ 휴전 회담 기간, 이순신 장군은 무엇을 하였나?

1593년 3월부터 1596년 9월까지, 명나라와 일본은 휴전 협상을 벌였습니다.
조선은 이 협상의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이순신 장군의 '공백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옥포에서 명량까지 이어지는 해전 서사에서, 전투 없는 4년은 한 일이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임금 '선조'도 이순신 장군이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중에서 어떤 분은 임금 '선조'처럼 싸움이 뜸했던 명과 왜의 4년간의 휴전 회담 기간에 이순신 장군이 별로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직접 난중일기에 답변을 남겨 두셨습니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난중일기 1594년 9월 3일)

이제, 명과 왜의 휴전 회담 기간에 어떤 일이 있었고 이순신 장군은 무엇을 하였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협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593년 초, 명나라와 일본은 이미 둘 다 지쳐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그해 1월, 이여송이 이끄는 4만 3천여 명의 병력으로 평양성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는 값비쌌습니다. 뒤이은 벽제관 전투에서는 이여송이 직접 이끈 정예 기병이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겨울 진군으로 말들에게 먹일 마초를 제때 대지 못해 말들이 굶주리고 역병까지 돌면서, 명나라 기병 전력은 크게 꺾였습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더 싸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일본군을 조선 북부에서 몰아낸다는 목표는 이미 이뤘습니다. 남의 나라 땅에서 자국 병력을 더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양에서 밀려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일본어와 왜에 밝다는 이유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협상 밀사로 발탁한 심유경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손을 잡았습니다. 두 사람은 1592년 9월, 평양에서 처음 만나 휴전을 논의했습니다. 159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협상이 시작됐고, 5월에는 심유경 등 명나라 사신단이 규슈 나고야까지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만납니다. 히데요시는 이 자리에서 조선 4도 할양, 명 황녀를 후궁으로 보낼 것 등 7가지 조건을 내놓습니다.

협상은 어떻게 끝났나

협상은 이후 3년 넘게 이어집니다. 그사이 명나라 조정에서는 정사 이종성, 부사 양방형을 책봉사절로 삼아 일본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1596년(병신년) 4월, 뜻밖의 소식이 한산도에도 전해집니다.

"명나라 사신(이종성)이 달아 나고 부사는 여전히 왜놈의 진영에 있는데, 4월 초8일에 달아난 까닭을 상부에 아뢰었다." (난중일기 병신년 4월 22일)

정사 이종성이 도망친 곳은 일본이 아니라 부산에 있던 왜군 진영이었습니다.
이종성은 히데요시가 책봉사를 붙잡아 욕보이려 한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인장과 관복까지 버린 채 변장하여 도망쳤습니다. 끝내 일본 땅은 밟아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남은 부사 양방형이 정사를 맡고, 심유경이 그 빈자리를 채워 협상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그해 9월에야 실제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히데요시에게 명 황제의 책봉 조서를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히데요시가 처음 내걸었던 조건들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문서였습니다. 격분한 히데요시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고, 4년 가까이 이어진 휴전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시작됩니다.

조선은 이 모든 과정에서 끝까지 협상의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협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부산에 심어둔 정보망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팔짱만 끼고 있다"는 선조의 질책

1594년(갑오년) 9월 3일, 한산도에 임금의 비밀 지시가 도착합니다.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병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

이순신 장군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난중일기 갑오년 9월 3일)

전투가 없다고, 이순신 장군이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활, 둔전, 배, 정보망 — 한산도의 하루

을미년(1595) 일기에는 활쏘기 기록이 없는 날을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우후·소비포권관·거제현령·미조항첨사가 아울러 와서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난중일기 을미년 1월 17일) 활쏘기는 소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실전에 쓰이는 훈련이었고, 장수들과 병사들의 사기를 관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정의 지원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둔전을 일구어 군량을 스스로 마련했습니다. "낙안군수가 와서, '둔전에서 거둔 벼를 실어왔다'고 보고했다."(난중일기 병신년 1월 20일) "흥양현감이 둔전의 벼 삼백쉰두 섬을 바쳤다."(난중일기 병신년 2월 8일)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경우 군량이 없으면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이순신 장군은 알고 있었습니다.

계사년(1593) 6월, 한산도로 진을 옮긴 뒤에는 곧바로 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전선(戰船)에 자귀질을 시작했는데, 자귀장이 이백열네 명이다."(난중일기 계사년 6월 22일) 싸움이 없는 동안에도,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산 왜영에 심어둔 사람들을 통해 협상의 흐름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유격 심유경(沈惟敬)과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 1월 16일 새벽에 바다를 건너갔다."(난중일기 병신년 1월 18~19일) 조정의 공식 통보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정보망을 운영해, 협상이 어디까지 갔는지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이 뜸했던 명과 왜의 휴전 회담 기간에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가장 두려운 적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미 이전 글에서 소개한 '기근과 역병'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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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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