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이순신 장군이 망궐례를 중단한 이유
'망궐례(望闕禮)'란 조선 시대 지방에 파견된 관리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 혹은 국가적 명절마다 새벽에 일어나 의복을 정제하고 멀리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며 올리는 의례를 말합니다. 그것은 지방관들에게 임금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는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실제로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새벽에 일어나 망궐례를 행한 날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은 임금에 대한 충성의 상징인 망궐례를 마지막 싸움인 노량대첩 직전까지 변함없이 올렸을까요? 이에 대해 난중일기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596년 10월 1일 이후, 난중일기에서 망궐례가 사라지다
1592년 1월 1일부터 시작되는 난중일기를 보면 장군은 거의 매월 빠짐없이 망궐례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1596년(병신년) 10월 1일 기록을 마지막으로, 노량대첩에서 전사할 때까지 약 2년 동안 망궐례는 난중일기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평소 규율을 목숨처럼 지키던 이순신 장군이 왜 전사하기 전, 2년 동안 이 중요한 충성의 의식을 중단한 것일까요? 망궐례가 마지막으로 올려진 1596년 10월 이후,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정유재란의 암운과 이순신 장군의 투옥
당시 국제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1596년 9월 1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이 사기극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조선 재침략(정유재란)을 명령합니다. 이 사실은 일주일 뒤인 9월 9일 조선 조정에도 전해졌습니다. 임진년에 아무런 준비 없이 당했던 조선은 이번에는 전쟁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조정의 어리석은 대응은 도리어 큰 화를 불렀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모함하는 원균의 참소를 받아들였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체포한 뒤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합니다. 이로 인해 난중일기는 1596년 10월 11일 이후부터 이순신 장군이 의금부 옥문을 나오는 1597년 4월 1일까지, 6개월에 가까운 기록이 통째로 누락됩니다.
(의금부 감옥을 나온 후, 장군에게 펼쳐진 이야기는 저의 [이순신 마지막 2년] 10부작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읽지않으신 분이 있다면 👉 바로가기를 참고해 주세요)
망궐례를 중단하고 이순신 장군은 무엇을 위해 싸웠나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딱 1년 전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순간부터 쉼 없이 전쟁을 준비했던 분입니다. 왜란이 터지기 바로 전날인 1592년 음력 4월 12일에는 거북선에 포를 장착하고 최초의 사격 시험까지 마쳤습니다. 전란이 터진 후에는 무패의 승리 행진으로 바다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스스로 둔전을 일구어 확보한 물자를 조정에 헌납하면서도 수군 전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은 그런 충신을 고문하고 죽이려 들었습니다.
이후 원균이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침몰시키자, 선조는 염치도 없이 이순신 장군에게 이름뿐인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다시 제수합니다. 장군은 고문으로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 명량대첩이라는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구며 다시 한번 조선을 구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순히 장군이 망궐례를 중단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은 망궐례를 올리던 전란 초반·중반보다, 망궐례를 중단한 마지막 2년 동안 훨씬 더 처절하게 전투에 임했고 마침내 그 바다에서 전사하였다는 점입니다.
장군에게 전쟁은 더 이상 왕인 선조와 조정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군에게는 왜군을 이대로 곱게 돌려보내면 반드시 다시 쳐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라는 이유가 있었기에,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노량의 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2년은, 망궐례를 잊은 대신, 그의 가슴속에 오직 '백성'들만 살아 숨 쉬던 가장 순수하고 숭고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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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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