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앞선 1편에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왜 '한산도가'의 첫 구절에 지명이 아닌 '찰 한(寒)' 자를 써서 춥고 시린 심경을 담았는지, 그리고 그해 가을 왜 통영이 아닌 전남 보성에 머물러야 했는지 역사적 비극을 짚어보았습니다.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의 열선루(列仙樓)
이제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의 열선루(列仙樓) 그 폭풍 전야의 현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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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보성의 열선루(列仙樓) |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된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밀지를 가진 어사를 만나기 위해 보성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어사가 가져온 왕의 명령은 냉혹했습니다. "조선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편입하여 싸우라."
이미 부산 앞바다로 나가 싸우라는 선조의 명을 한 번 어겼다는 이유로 압송되어 죽을 고문을 당했던 장군이었습니다. 또다시 군령을 어기면 이번엔 정말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수군을 없애라는 임금의 밀지를 앞에 두고, 명령을 거스르고 바다를 지켜야만 하는 장군의 고민은 뼈를 깎는 듯 깊었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오래 고뇌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철옹성이라 믿었던 진주의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고, 전라도 전체가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이 절대적인 고독과 절망 속에서, 장군은 마침내 선조를 향해 목숨을 건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립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장군이 보성에 머물렀던 시기는 8월 9일부터 17일 사이. 그 삼엄한 운명의 기로 속에서, 8월 15일 한가위 보름달이 뜨자 장군은 보성 열선루에 올라 비장한 각오로 '한산도가'를 읊은 것입니다.
이제 이 시조가 전과 다르게 느껴지시나요? 한가로운 달밤의 정취가 아닙니다. 춥고 쓸쓸한(寒)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왕명마저 가로막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독한 결단과 피눈물이 배어 있는 절규입니다.
나를 일으켜 세운 한산도가
사실 이 시는 저에게 생명의 은인과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저는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고 앞날이 막막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들을 잇달아 겪으며, 매일 밤 술 기운에 기대어 간신히 잠들곤 하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취한 밤이었습니다. 내 입술을 통해 아무 이유 없이 이 시조가 나지막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마도 그날 취한 채로 건물 옥상에 누워 바라보던 보름달이 한산도가를 생각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뱉어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불현듯 거대한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강타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겪은 그 처절한 억울함에 비하면, 지금 내가 겪는 억울함은 도대체 얼마나 크단 말인가? 너는 도대체 무엇이 그리 억울하다고 주저앉아 있느냐?'
그 고독한 영웅의 외침이 제 정신을 번쩍 깨웠고, 저는 그날 밤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고 어려운 일이 생각날 때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가를 읊으시던 8월 15일 보성 열선루(列仙樓)를 생각하며 저의 그릇을 조금 더 크게 키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오늘부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제 삶을 일으켜 세워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2년을 주제로 연재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언제 이 글이 끝날지, 그분의 삶을 제 미천한 필력으로 다 담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제가 그날 밤 받았던 감동과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으려 애를 쓸 작정입니다.
👉 [이순신 마지막 2년] ③ 백의종군 길에 마주한 어머니의 죽음
몸철학 드림.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를 새놉게 보게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음 글도 기대가 됩니다
답글삭제제 글이 님에게도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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