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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칠천량의 치욕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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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4월 19일, 어머님의 장례조차 제대로 모시지 못한 채 백의종군 길을 걷던 이순신 장군은 두 달 가량의 행로 끝에 6월 4일 목적지인 경남 합천의 도원수 권율 진중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도착한 지 한달 보름 정도가 지나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이순신 장군에게 전해집니다. 조선 수군의 몰살, '칠천량의 치욕' 7월 18일 새벽, 칠천량(거제도와 그 부속 섬인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협)에서 조선 수군이 몰살당했다는 참담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순신을 모함하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했던 원균이 부임한 지 고작 5개월 만에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의금부로 잡혀가기 전, 신임 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한 수군의 전력은 조선 역사상 최강이었습니다. 거북선 3척, 판옥선 134척, 그리고 1만 7천 명에 달하는 무패의 정예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에서 배설이 도망치며 빼돌린 판옥선 12척을 제외한 조선 수군 자체를 몽땅 수장시키고 자신은 배를 버리고 도망치다 죽었다 하니, 이를 어찌 전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칠천량의 치욕’이었습니다. 고문과 절망을 딛고 다시 바다로 향한 이순신 장군 비보를 들은 당일, 이순신 장군은 당황하던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자신이 직접 남해안을 돌며 상황을 파악하겠다고 하고, 다음 날 바로 길을 떠납니다. 왕은 자신을 죽이려 고문까지 행하였고 원균은 최강의 조선 수군을 모두 수장시킨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지체 없이 길을 떠난 것입니다. 무엇이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이렇게 빨리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일까요? 선조에 대한 충성도 아니고,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명예 때문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이렇게 지체 없이 고문 당한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일까요? 회령포 역사공원 앞에 세워진 조선수군재건로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열선루 장계에 숨겨진 진실 길을 떠난 이순신 장군은 8월 3...

②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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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1편에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왜 '한산도가'의 첫 구절에 지명이 아닌 '찰 한(寒)' 자를 써서 춥고 시린 심경을 담았는지, 그리고 그해 가을 왜 통영이 아닌 전남 보성에 머물러야 했는지 역사적 비극을 짚어보았습니다.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의 열선루(列仙樓) 이제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의 열선루(列仙樓) 그 폭풍 전야의 현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전남 보성의 열선루(列仙樓)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된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밀지를 가진 어사를 만나기 위해 보성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어사가 가져온 왕의 명령은 냉혹했습니다. "조선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편입하여 싸우라." 이미 부산 앞바다로 나가 싸우라는 선조의 명을 한 번 어겼다는 이유로 압송되어 죽을 고문을 당했던 장군이었습니다. 또다시 군령을 어기면 이번엔 정말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수군을 없애라는 임금의 밀지를 앞에 두고, 명령을 거스르고 바다를 지켜야만 하는 장군의 고민은 뼈를 깎는 듯 깊었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오래 고뇌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철옹성이라 믿었던 진주의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고, 전라도 전체가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이 절대적인 고독과 절망 속에서, 장군은 마침내 선조를 향해 목숨을 건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립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장군이 보성에 머물렀던 시기는 8월 9일부터 17일 사이. 그 삼엄한 운명의 기로 속에서, 8월 15일 한가위 보름달이 뜨자 장군은 보성 열선루에 올라 비장한 각오로 '한산도가'를 읊은 것입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제 이 시조가 전과 다르게 느껴지시나요? 한가로운 달밤의 정취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