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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난중일기, 평범함 속에 숨겨진 비범함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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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 옥문을 나온 날, 난중일기에 남긴 한 줄 1597년 4월 1일, 이순신 장군은 28일간의 혹독한 고문 끝에 의금부 옥문을 나섭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나온 날, 그의 난중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난중일기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임금에 대한 원망도, 현재 상황에 대한 억울함도 단 한 줄 없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처음 읽었을 때 이상한 감동이 느껴져 거의 목이 메였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순간에 이토록 평범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런데 난중일기 7년을 다시 읽어보니, 이런 평범한 기록은 4월 1일 하루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천해전 총상: "중상은 아니었다"는 기록 뒤의 진실 1592년 5월 29일, 임진왜란이 터진 지 한 달여 만에 벌어진 사천해전에서의 일입니다. 그날의 일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는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포들을 우레같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나는데... 이 싸움에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총알이 어깨를 뚫고 등으로 빠져나간 날입니다. 장군은 이를 "중상은 아니었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1593년, 장군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이 상처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들은 정확한 날짜가 적혀 있지 않지만, 난중일기에는 1593년(계사년) 3월 22일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편지글 곳곳에 이런 구절이 반복됩니다.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심하였고... 어깨뼈까지 깊이 다쳐 진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며, 또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민망스럽습니다." "뽕나무 잿물로 혹은 바닷물로 씻어 보지만, ...

⑤ 칠천량의 치욕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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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4월 19일, 어머님의 장례조차 제대로 모시지 못한 채 백의종군 길을 걷던 이순신 장군은 두 달 가량의 행로 끝에 6월 4일 목적지인 경남 합천의 도원수 권율 진중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도착한 지 한달 보름 정도가 지나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이순신 장군에게 전해집니다. 조선 수군의 몰살, '칠천량의 치욕' 7월 18일 새벽, 칠천량(거제도와 그 부속 섬인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협)에서 조선 수군이 몰살당했다는 참담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순신을 모함하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했던 원균이 부임한 지 고작 5개월 만에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의금부로 잡혀가기 전, 신임 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한 수군의 전력은 조선 역사상 최강이었습니다. 거북선 3척, 판옥선 134척, 그리고 1만 7천 명에 달하는 무패의 정예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에서 배설이 도망치며 빼돌린 판옥선 12척을 제외한 조선 수군 자체를 몽땅 수장시키고 자신은 배를 버리고 도망치다 죽었다 하니, 이를 어찌 전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칠천량의 치욕’이었습니다. 고문과 절망을 딛고 다시 바다로 향한 이순신 장군 비보를 들은 당일, 이순신 장군은 당황하던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자신이 직접 남해안을 돌며 상황을 파악하겠다고 하고, 다음 날 바로 길을 떠납니다. 왕은 자신을 죽이려 고문까지 행하였고 원균은 최강의 조선 수군을 모두 수장시킨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지체 없이 길을 떠난 것입니다. 무엇이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이렇게 빨리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일까요? 선조에 대한 충성도 아니고,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명예 때문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이렇게 지체 없이 고문 당한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일까요? 회령포 역사공원 앞에 세워진 조선수군재건로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열선루 장계에 숨겨진 진실 길을 떠난 이순신 장군은 8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