㉙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왜의 무기 비교
앞서 「① '칼의 노래'가 아니라 '활의 노래'다」에서 조선의 활과 왜군의 조총을 비교하며,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 결국 '원거리 함포전'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그 원거리 함포전의 진짜 주인공, 판옥선에 실린 화포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 편전, 비격진천뢰까지, 조선 수군이 가진 무기들의 사거리를 하나씩 짚어본다.
사료는 사거리를 '보(步)'라는 단위로 기록한다. 그런데 이 '보'가 발 한 짝을 내딛는 한 걸음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오른발과 왼발이 각각 한 번씩 번갈아 나가는 동작 전체를 하나로 센 것이 1보다. 로마 단위의 '파수스(두 걸음)'와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자료에 따르면, 조선은 주척(周尺)이라는 자를 써서 6자(척)를 1보로 삼았고, 주척 1자는 약 20cm였다. 계산하면 1보는 약 1.2m다. 성인의 발걸음 하나가 대략 60cm 안팎인 것을 생각하면, 오른발·왼발이 한 번씩 나간 거리가 1.2m 정도라는 계산과도 맞아떨어진다.
이 글에서는 이 기준(1보≈1.2m)으로 환산한 수치를 괄호 안에 함께 적는다. 다만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른 환산값을 쓰기도 하니, 참고치로 봐주시면 좋겠다.
조선의 화포 —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
고려 말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세워 화약 무기를 만든 이래, 조선은 세종 때부터 화포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총통등록》이라는 책에 제작법과 사용법을 따로 기록해둘 정도였다. 각 화포에는 크기 순서대로 천자문의 '천·지·현·황'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이후 명종과 선조 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개량이 이루어졌다.
| 화포 | 주요 발사체 | 사거리(기록상) | 환산(약 1.2m/보) | 비고 |
|---|---|---|---|---|
| 천자총통 | 대장군전(길이 약 2.4m, 무게 약 30kg) | 1,200~1,300보 | 약 1.44~1.56km | 조선 화포 중 가장 큼 |
| 지자총통 | 장군전 | 800보 | 약 960m | 천자총통 다음으로 큼 |
| 현자총통 | 차대전 / 차중전 | 800보 / 1,500보 | 약 960m / 1.8km | 화약 소모가 적어 가장 널리 쓰임 |
| 황자총통 | 피령차중전 등 | 1,100보 | 약 1.32km | 가장 작은 소형 화포 |
천자총통의 사거리는 자료마다 1,200보로도, 1,300보로도 나온다. 위키백과는 1,300보를 약 1.4km로 환산해 적어 두었는데, 이 글의 환산 기준(1보≈1.2m, 약 1.56km)보다 조금 낮다. 보와 척의 기준이 시대와 자료마다 조금씩 달라 생기는 차이로 보이며, 어느 쪽이 정확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장군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조선 화포 중 가장 크고 멀리 나가는 무기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현자총통은 차대전을 쓰면 800보(약 960m), 더 가벼운 차중전을 쓰면 1,500보(약 1.8km)까지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화약을 적게 쓰면서도 효율이 좋아 조선 수군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화포였다.
편전 — 짧아서 더 멀리 간 화살
편전은 흔히 '애기살'이라 부르는, 일반 화살보다 훨씬 짧은 화살이다. 통아(筒兒)라는 보조 기구에 넣어 쏘는데, 짧고 가벼운 만큼 속도가 빠르고 관통력도 강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는 "1,000보 이상의 거리까지 날아가 적을 맞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1,000보면 약 1.2km다. 조선은 편전 쏘는 법이 적국에 새어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는데, 그만큼 실전에서 위력이 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도 편전을 자주 쏘았다. 《난중일기》에는 철전, 편전, 활을 함께 쏘며 훈련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비격진천뢰 — 시한폭탄을 쏘다
비격진천뢰는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이 1591년 무렵 만든 무기다. 무쇠로 둥근 박 모양의 몸체를 만들고 그 안에 화약과 쇳조각을 채운 뒤, 도화선 감는 길이를 조절해 폭발 시간을 맞췄다. 대완구 같은 화포에 넣어 쏘면 목표 근처에서 시간차를 두고 터지는 방식이다. 사거리는 500~600보(약 600~720m) 정도로 전해진다.
1592년 9월,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박진이 처음 실전에 사용해 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진주성 전투 등에서도 활용되며 왜군을 상당히 두렵게 만든 무기로 꼽힌다.
왜군의 조총, 그리고 세키부네에는 함포가 없었다
왜군의 주력 개인화기였던 조총은 앞선 글에서 다뤘듯, 정확히 조준해 명중시킬 수 있는 거리가 50m 안팎이었다. 화약을 채우고 탄환을 다지는 절차가 복잡해 숙련자도 1분에 1~2발밖에 쏘지 못했다. 대신 그 거리 안에서는 관통력이 매우 강해, 근접전과 육전에서는 위협적인 무기였다.
그런데 조총 사거리만 놓고 비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왜군 함선에는 애초에 조선처럼 배에 실을 만한 함포 자체가 마땅치 않았다. 왜군 수군의 주력선이었던 세키부네는 대부분 화포를 탑재하지 못했고, 그보다 큰 지휘선급 아타케부네(안택선)도 경우에 따라 1~3문 정도를 싣는 데 그쳤다고 전해진다. 삼나무에 쇠못을 써서 지은 왜선의 구조가 화포 발사의 반동을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타케부네(안택선)는 주력함이 아니라 지휘관이 타는 기함(旗艦)으로 주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전열에 나서서 싸운 아타케부네(안택선)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포를 실을 수 있는 배도 드물었는데, 그나마 그 배가 전투 한복판에 나서는 경우조차 흔치 않았던 셈이다.
이때 아타케부네(안택선)에 실렸던 화포는 조선의 총통과는 계통 자체가 다르다.
일본은 15세기 말까지 자체적인 대형 화포 기술이 거의 없었다. 이들이 쓴 화포는 대개 '불랑기포(佛狼機砲)'라 불리는, 유럽에서 개발되어 포르투갈 상인들이 남만무역을 통해 들여온 후장식 소형포 계열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규슈의 다이묘 오토모 소린이 '구니쿠즈시(国崩し)'라는 별명으로 부른 불랑기포로 우스키 성을 지켜낸 것이 1586년 무렵이니, 임진왜란 발발 불과 몇 년 전에야 일본이 이런 화포를 막 손에 넣기 시작한 셈이다. 불랑기포는 후장식이라 장전은 빨랐지만, 대형이라 해도 사거리는 500m에서 1km 정도로 알려져 있어 조선의 천자·지자총통에는 못 미쳤다. 세종 때부터 150년 가까이 자체 기술로 체계화해 온 조선의 화포와, 남의 나라에서 들여온 지 얼마 안 된 일본의 화포는 애초에 축적된 시간 자체가 달랐던 셈이다.
설령 왜군이 전투 중에 조선의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을 손에 넣었다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총통들은 앞서 본 것처럼 대장군전 같은 크고 무거운 발사체를 강한 화약으로 쏘아 보내는 화포다. 그만큼 반동도 컸다는 뜻이다. 나무못으로 결합해 충격을 흡수하는 판옥선과 달리, 쇠못으로 뻣뻣하게 고정된 아타케부네의 선체로는 그 반동을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화포 자체를 손에 넣더라도 배가 받쳐주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셈이다.
반면 조선의 판옥선은 소나무와 나무못으로 튼튼하게 지어져,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을 여러 문 갑판에 싣고 쏠 수 있었다. 화포로만 비교해도 전력 차이가 컸다는 뜻이다.
원거리 함포전
조선의 화포들은 짧게는 800보(약 960m), 길게는 1,500보(약 1.8km)까지 날아갔고, 편전 역시 1,000보(약 1.2km)를 넘겼다. 반면 조총이 정확히 맞힐 수 있는 거리는 50m 안팎이었고, 그나마 왜군의 주력함인 세키부네에는 함포조차 없었다. 어느 쪽 수치를 기준으로 잡아도 그 격차는 조총 사거리의 20배 정도에 해당한다.
이순신 장군이 원거리 함포전을 기본으로 삼아 전술을 사용한 이유는 조선수군이 가진 강점을 극대화 하면서 적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지피지기는 백전배승'이라는 말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다만 이순신 장군이 늘 원거리 함포전으로만 싸운 것은 아니다.
명량대첩(1597년 9월 16일) 당일,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적선 두 척에 둘러싸여 근접전을 벌인 기록이 《난중일기》에 남아 있다.
"적장이 그 휘하의 배 두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 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 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데다가, 안위의 격군 일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
먼 바다에서 화포로 압도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열세 척으로 백서른세 척을 막아선 그날은 사정이 달랐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수많은 해전 가운데 근접전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명량대첩과, 장군이 전사한 마지막 전투인 노량대첩, 이 두 번뿐이다.
원거리 함포전으로 일관했던 장군에게 명량대첩과 노량대첩은 그만큼 예외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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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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