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이순신 장군을 만나 용장으로 거듭난 사람, 김완 장군

김완 장군은 누구인가?

김완(金浣) 장군은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입니다.

1546년, 경상도 영천군 자양현 노항촌(지금의 경북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응생(金應生)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고향에 자양서당을 세운 인물입니다. 김완 장군은 그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나이는 이순신 장군보다 한 살 적습니다.

충의사에 함께 모셔진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
충의사에 함께 모셔진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

1577년(선조 10), 별시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이후 사도진(蛇渡鎭, 지금의 여수시 여도)의 첨절제사, 곧 사도첨사에 임명되어 전라좌수영 소속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정확한 임명 연도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1589년이라고 언급한 곳도 있고, 1591년이라고 언급한 곳도 있습니다. 어쨌든, 1592년 2월 이순신 장군이 처음 순시할 때는 이미 사도첨사로 재임 중이었습니다.

좋지 않았던 첫 만남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좋지 않았습니다. 1592년 2월 24일, 이순신 장군은 관할 수군진을 순시하던 중 사도(蛇渡, 지금의 고흥군 점암면)에 이릅니다. 전선을 점검하고 하룻밤을 묵은 다음 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전쟁 방비에 탈난 곳이 많다.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줬다.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를 내어 보냈다. 이곳의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최하인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고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조차 하지 못했으니 우습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5일)

이 대목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첨사"로만 적혀 있지만, 당시 사도첨사가 김완이었으니 사실상 그를 두고 한 말입니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 가장 못하다는 지적을 받은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이번에는 거짓 보고까지 겹칩니다. 3월 20일, 이순신 장군은 관할 지역 수색이 늦어진 일로 여러 장수를 문책하다가, 사도첨사 김완에게도 공문을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이 문제였습니다. 난중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도첨사(김완)에게도 만날 일로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했다고 했다." "또 한나절 동안에 내나로도∙외나로도(고흥군 봉래면)와 대평두∙소평두 섬을 다 수색하고 그 날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 일은 너무도 엉터리 거짓이다." (난중일기, 1592년 3월 20일)

배를 타고도 한나절 만에 다녀올 수 없는 거리를, 혼자서 다 수색하고 그 날로 돌아왔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여러 장수 가운데, 이렇게 대놓고 "엉터리 거짓"이라는 말을 들으며 등장하는 인물은 흔치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의 인연은 이렇게 그리 좋지 않은 첫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옥포에서 한산도까지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그해 4월 29일, 이순신 장군은 경상도로 출정하는 함대의 편성을 갖추면서 김완 장군을 우척후장(右斥候將)에 임명합니다. 적의 동향을 가장 먼저 살피는 자리였습니다.

6월 초7일에는 영등포 앞바다에서 달아나는 적선을 뒤쫓는 전투가 있었습니다.

"사도첨사 김완이 한 척을 온전히 잡고, 우후도 한 척을 온전히 잡고, 녹도만호 정운도 한 척을 온전히 잡으니, 모두 왜적의 머리가 서른여섯 개이다." (난중일기, 1592년 6월 초7일)

그리고 7월 초8일, 한산도대첩에서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여섯 급을 베었고" (한산도대첩 장계, 1592년 7월 초8일)

거짓 보고로 이순신 장군을 화나게 했던 장수는, 불과 서너 달 사이에 조선 수군의 가장 앞자리에서 싸우는 장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김완 장군은 당포·부산포·당항포 해전에서 잇단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오릅니다.

이순신 장군을 만나기 전에는 근무 태만과 거짓 보고까지 하던 김완 장군이 불과 서너 달 만에 용장으로 바뀌어 전쟁터를 누비는 모습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나 김완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용장으로 거듭나 있었고, 그런 김완 장군을 이순신 장군은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활약하게 만들었습니다.

복병장 김완 장군

1593년 7월, 김완 장군은 복병장으로서 또 다른 일을 겪습니다. 복병장(伏兵將)은 매복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로, 적이 지나갈 만한 길목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아군의 다른 배들이 유인해 온 적을 기습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복병 임무를 수행하던 중 왜인 옷으로 변장한 포작(鮑作, 바닷일을 하던 백성) 열 명을 붙잡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첩자로 의심했으나, 취조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사도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에 잡은 포작 열 명이 왜놈옷으로 변장하고 하는 짓거리가 매우 꼼꼼하다 하여 잡아다가 추궁을 하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시킨 일이다.'" (난중일기, 1593년 7월 28일)

포작들을 왜인처럼 꾸며 첩보 활동을 시킨 것이 다름 아닌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시였다는 것입니다. 김완 장군은 이 일을 그저 맡은 복병 임무 하나로 처리했을 뿐이지만, 그 뒤에 원균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입니다.

'원균은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을 이렇게 비열한 방식으로 염탐하고 있었다'고 저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똑같은 패턴의 파면과 재기용

순탄하게 이어지던 김완 장군의 자리에도 시련이 찾아옵니다. 1596년 2월 초6일, 난중일기는 이렇게 전합니다.

"사도첨사 김완은 조도어사의 장계로써 파면되었다는 기별이 또 이르렀다. 본디의 포구(골사도)로 내어 보냈다." (난중일기, 1596년 2월 초6일)

조도어사(調度御史)는 군량 등 군수 물자의 조달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한 어사로, 지방관의 근무 태만이나 비리를 적발해 장계로 조정에 보고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파면되었는지는 난중일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과 한 달 반 뒤인 3월 23일 기록에 김완 장군은 다시 등장합니다.

"조방장 김완 및 충청수군의 배 여덟 척이 들어오고 우후도 왔다." (난중일기, 1596년 3월 23일)

사도첨사에서 파면되었던 그가, 이번에는 조방장(助防將)이라는 이름으로 이순신 장군 곁에 돌아온 것입니다. 이후 난중일기에서 김완 장군은 줄곧 "조방장"으로만 불립니다.

이순신 장군의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휘하 장군들은 이전 글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비슷한 패턴으로 파직과 시련을 당하고 얼마 후 다시 복귀했습니다. 어영담 장군, 권준 장군, 이순신(李純信) 장군, 배흥립 장군, 그리고 이제 그 패턴을 김완 장군에게서도 보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고, 이에 대해서는 추가로 조사해 글로 쓸 예정입니다.

칠천량, 그리고 포로

1597년 6월 12일,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여러 장수에게 편지를 보낸 기록에 "조방장 김완"의 이름이 나옵니다. 난중일기에서 김완 장군이 등장하는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궤멸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함대가 무너지는 가운데, 도체찰사 이원익은 훗날 조정에 이렇게 보고합니다.

"살아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입니다.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 뿐이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8월 5일)

김완 장군 자신이 남긴 「용사일록(龍蛇日錄)」에는 그날 밤의 상황이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주변의 만호들이 모두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달아나는 가운데, 그는 홀로 뒤에서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며 항전했다고 적습니다.

"나는 혼자 군관, 사부, 노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하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이 편전 10여발을 쏘았을 뿐이다." (용사일록)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바다에 빠진 김완 장군은 며칠을 표류합니다. 기력이 다하자 포로가 되느니 죽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결국 목숨을 잃지 않은 채 왜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습니다.

앞서 도체찰사 이원익이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 뿐"이라고 조정에 보고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표류하다 사라진 그를 다시 확인할 길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죽은 것으로 여겨졌던 셈입니다.

칠천량 전투에서 살아남아 그날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으로 남긴 것은 김완 장군이 거의 유일합니다. 그가 남긴 「용사일록」은 자신의 공적이나 상황을 부풀리지 않고 담담하게 적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그 기록 속에서 원균은 전투가 벌어지던 그 시각,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있었습니다.

원균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확실한 증언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원균에 대해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하거나 원균을 공신으로 충신으로 용장으로 생각하는 분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다만 원균에 대한 이전 글에서 한 마디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 원균과 원균을 재평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한 마디

해동소무(海東蘇武)

포로가 된 김완 장군은 대마도, 일기도, 나고야를 거쳐 고쿠라까지 옮겨 다니며 감금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1598년 1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배를 훔쳐 탈출합니다. 그해 4월 18일 부산 다대포에 도착했고, 4월 29일 양산에서 신원을 확인받았습니다. 칠천량에서 포로가 된 지 약 9개월 만이었습니다.

귀국한 그는 억류 기간 동안 파악한 일본 내부 정세를 조정에 알렸습니다. 선조는 그의 절개를 한나라 때 흉노에 억류되면서도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소무(蘇武)에 빗대어,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내렸습니다.

이후 함안군수에 제수되었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그리고 1607년, 고향 영천에서 예순두 해의 생을 마쳤습니다. 후손들은 그를 기려 영천 임고면에 동린각(東麟閣)을 세웠고, 그곳에는 지금도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김완 장군은 거짓 보고로 이순신 장군을 화나게 하며 등장했지만, 옥포·당포·한산도·부산포에서 잇단 공을 세워 신뢰를 얻었습니다. 한때 파면을 당하고도 조방장으로 다시 불려 나왔고, 칠천량에서는 다른 장수들이 달아나는 가운데 홀로 남아 싸우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9개월 만에 죽음을 무릅쓰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김완 장군은 이순신 장군을 만난 후 용장으로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⑪ 원균의 부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을 진심으로 따른 사람, 이영남 장군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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