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이순신 장군과 서로의 병수발까지 들어 준 사람, 배흥립 장군
배흥립 장군은 누구인가?
배흥립(裵興立) 장군은 본관이 성주(星州, 성산星山으로도 표기됩니다)이고, 자는 백기(伯起)입니다. 시호는 효숙(孝肅)입니다.
1546년에 태어났으니, 1545년생인 이순신 장군과는 한 살 차이, 사실상 동갑내기입니다. 아버지는 영산현감을 지낸 배인범(裵仁範)입니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그는 흥양현감(興陽縣監, 지금의 전남 고흥)이었습니다. 흥양은 전라좌수영(여수) 관할의 다섯 고을 가운데 하나로, 사도∙여도∙녹도∙발포 등 여러 진(鎭)을 거느린 요충지였습니다.
흥양현감과 순천부사, 나란히 등장하다
난중일기에서 배흥립 장군이 처음 등장하는 날짜는 1592년 1월 26일, 전쟁이 나기 석 달 전입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흥양현감(裵興立)과 순천부사(權俊)이 와서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1592년 1월 26일)
「이순신 장군의 사람들」 앞선 편에서 소개해 드린 권준 장군과 정확히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이웃 고을 수령으로서 함께 진영을 드나드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흥양현감과 순천부사는 이순신 장군에게 이미 낯익은 얼굴이었던 셈입니다.
전부장이 되어
전쟁이 터지자, 이순신 장군은 함대의 진을 편성하면서 배흥립 장군에게 전부장(前部將)을 맡깁니다. 1592년 4월 27일의 기록입니다.
"중위장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장에 낙안군수 신호(申浩), 전부장에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중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후부장에 녹도만호 정운(鄭運)..." (난중일기 1592년 4월 27일)
전부장은 함대가 나아갈 때 맨 앞에 서는 자리입니다. 개전 초기부터 배흥립 장군은 가장 위험한 자리를 맡은 장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한산도대첩, 적선을 온전히 잡다
1592년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배흥립 장군은 직접 전과를 올립니다.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이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덟 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한산도대첩 장계, 1592년 7월 8일)
권준 장군, 이순신(李純信) 장군과 나란히, 배흥립 장군도 이 전투에서 확실한 공을 세운 장수 중 하나였습니다.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한" 다섯 장수
같은 해 9월 1일 부산포대첩을 치른 뒤, 9월 11일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 장계를 올립니다. 이 장계에는 「이순신의 사람들」에서 이미 여러 번 소개해 드린 그 유명한 문장이 나옵니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어영담(魚泳潭)∙배흥립(裵興立)∙정운(鄭運)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장계, 1592년 9월 11일)
이순신 장군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했다고 밝힌 다섯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배흥립 장군입니다. 이 가운데 정운 장군은 이 부산포대첩에서 전사했고(「이순신의 지음, 정운 장군」 편 참고), 권준 장군과 이순신(李純信) 장군의 이야기는 앞선 두 편에서 다뤘습니다. 배흥립 장군은 이 다섯 사람 중 유일하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순신 장군의 가장 가까운 곳에 남아 있게 되는 인물입니다.
도양장 둔전을 돌보다
배흥립 장군은 싸움만 잘하는 장수가 아니었습니다. 1595년 6월 초6일, 이순신 장군은 이런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송희립(宋希立)이 들어 왔다. 그 편에 도양장의 농사 형편을 들으니, 흥양현감이 무척이도 애를 썼기 때문에 추수가 잘 될 것이라고 했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초6일)
도양장은 흥양 지역의 둔전(屯田, 군량을 대기 위한 국가 소유 농지)이었습니다. 전쟁 중 군량 확보는 전투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는데, 배흥립 장군은 이 일도 성실히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의금부로 끌려가다
그러나 같은 을미년(1595년) 겨울, 배흥립 장군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사흘에 걸쳐 이런 기록이 이어집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흥양현감(배흥립)을 잡아갈 나장이 들어왔다고 한다." (난중일기 1595년 1월 26일)
"의금부의 나장이 와서 흥양현감을 잡아갈 일을 전했다." (난중일기 1595년 2월 초1일)
"흥양현감(배흥립)이 잡혀갔다." (난중일기 1595년 2월 초2일)
무슨 죄목이었는지는 난중일기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일이 그의 앞길을 완전히 끊어 놓지는 않았습니다. 배흥립 장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순신 장군 곁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권준 장군도, 무의공 이순신 장군도, 이제 배흥립 장군도 비슷한 시기에 파직을 당하거나 잡혀가거나...그리고 돌아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시간을 가지고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혹시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는 조정의 세력이 장군의 최측근을 먼저 손보려고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백의종군, 가장 힘든 날 곁을 지키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의 몸으로 풀려납니다. 죄인의 신분으로 남쪽 진주 땅을 떠돌던 이 시기, 배흥립 장군은 몇 번이고 그의 곁을 찾아옵니다.
1597년 5월 22일,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혼자 앉았으니 비통하여 견디기가 너무 어렵다. 어두울 무렵 배흥립(裵興立) 동지와 이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와서 봤다." (난중일기 1597년 5월 22일)
가장 비통했던 날 저녁,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온 사람 가운데 배흥립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튿날인 5월 23일, 그는 자신의 임무가 있는 한산도로 다시 돌아갑니다.
"저녁나절에 동지 배흥립(裵興立)이 한산도로 돌아갔다." (난중일기 1597년 5월 23일)
병든 몸으로 끝까지
이후로도 배흥립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여정에 거듭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무렵 그는 몸이 몹시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주 굴동의 전에 묵었던 곳에 이르러 잤다. 백기 배흥립(裵興立)도 와서 잤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23일)
이틀 뒤, 이순신 장군은 몸소 그를 문병합니다.
"저녁에 가서 백기 배흥립(裵興立)의 병을 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했다. 걱정이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25일)
그럼에도 배흥립 장군은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8월 10일, 이순신 장군이 몸이 불편해 김안도의 집에 머물렀을 때도 그는 곁을 지켰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金安道)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裵興立)도 같이 머물렀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10일)
두 사람 다 성치 않은 몸으로, 그래도 곁을 떠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8월 10일을 마지막으로, 난중일기에는 배흥립 장군의 이름이 뚝 끊깁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에서 열세 척의 배로 왜선 백서른세 척을 물리칩니다. 이 전투를 기록한 그날의 일기에는 안위, 김응함, 송여종, 정응두, 우수사 김억추의 이름만 구체적으로 나올 뿐, 배흥립 장군의 이름은 없습니다. 함께 병수발을 들던 사이라 참전을 짐작하기 쉽지만, 적어도 난중일기만 놓고 보면 그는 명량대첩에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명량 이후, 다시 조방장으로
명량대첩이 끝나고 약 한 달 뒤인 1597년 10월 13일, 배흥립 장군은 "조방장 배흥립"이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난중일기에 등장합니다. 장소는 전투가 벌어졌던 명량 해협이 아니라, 함대가 서해를 따라 북상하던 길목인 안편도 부근입니다.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3일)
이후로도 그는 조방장으로서 이순신 장군 곁에 꾸준히 나타납니다.
"저녁 나절에 경상수사(이순신)와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와서 봤다." (난중일기 1597년 12월 26일)
"경상수사와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와서 봤다." (난중일기 1597년 12월 28일)
여기서 "경상수사"는 「이순신의 사람들」 앞선 편에서 소개해 드린, 이순신 장군과 이름이 같은 이순신(李純信) 장군입니다. 두 이순신과 배흥립, 세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해가 바뀌어 1598년 1월까지도 이어집니다.
"저녁나절에 비가 잠깐 내렸다. 경상수사 ∙ 조방장 및 여러 장수들이 다 와서 모였다." (난중일기 1598년 1월 초1일)
난중일기는 1598년 10월 7일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대첩에서 전사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1월 19일의 일이라, 이 마지막 전투에 배흥립 장군이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는 이번 조사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분명한 것은, 배흥립 장군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정운 장군, 이억기 장군, 어영담 장군처럼 전쟁 중 세상을 떠난 동료들과 달리,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나라의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1596년 장흥부사를 지냈고, 이후 경상우도수군절도사와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04년 공조참판, 같은 해 충청도수군절도사, 1605년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습니다. 1607년에는 영흥도호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인 1608년 병으로 벼슬을 내려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해, 예순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호는 효숙(孝肅)입니다.
글을 마치며
전쟁이 나기 석 달 전 처음 등장해, 한산도대첩과 부산포대첩에서 함께 싸우고, 도양장 둔전까지 성실히 챙기다가, 억울하게 의금부에 끌려갔다 돌아오고, 백의종군의 가장 참담한 날들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과 서로의 병수발까지 들어준 사람이 바로 배흥립 장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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