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이순신 장군과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 장군
이순신(李純信) 장군은 누구인가?
이순신(李純信) 장군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자는 입부(立夫)입니다. 시호는 무의(武毅)입니다.
태어난 해는 1554년으로 1545년생인 이순신 장군(李舜臣)보다 아홉 살 아래입니다.
이순신 장군과는 본관도 다르고(덕수 이씨-전주 이씨), 항렬도 다른, 그야말로 우연히 이름 석 자만 같은 남남입니다.
(저는 이하 글에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장군이라는 직책을 빼고 이순신(李純信)이라고 한글과 한문을 같이 표기하겠으니 이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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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공 이순신(李純信) 묘 안내문 |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그리고 1591년, 전라좌수영 소속 방답진(전남 여수시 돌산읍)의 첨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난중일기가 시작되자마자 등장한 사람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열흘 뒤, 이순신(李純信)이 처음 등장합니다.
"방답에 새 첨사로 이순신(李純信)이 부임하여 들어왔다." (난중일기 1592년 1월 10일)
전쟁이 터지기 석 달 전입니다. 「이순신의 사람들」 앞선 편에서 소개한 권준 장군의 첫 등장이 1592년 1월 26일이었으니, 이순신(李純信)은 그보다도 보름 이상 앞서 이순신 장군의 곁에 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이후 전쟁 내내, 방답첨사는 순천부사·흥양현감·광양현감 등과 더불어 난중일기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웃 수령 중 한 명이 됩니다.
한산도대첩과 부산포대첩의 전부장
전쟁이 터지자, 이순신(李純信)은 조선 수군의 중위장(中衛將)을 맡습니다. 1592년 4월 27일, 이순신 장군이 진을 편성한 기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중위장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장에 낙안군수 신호(申浩), 전부장에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중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후부장에 녹도만호 정운(鄭運)..." (난중일기 1592년 4월 27일)
훗날 권준 장군이 맡게 되는 중위장 자리를, 전쟁 초기에는 이순신(李純信)이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1592년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네 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쳐부수어 일시에 불태웠다." (한산도대첩 장계, 1592년 7월 8일)
머리를 베는 대신 적을 쏘아 죽이는 데만 몰두했다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전공을 증명하는 수단(수급)보다 눈앞의 적을 처리하는 것을 우선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두 달 뒤인 9월 1일, 부산포대첩에서는 전부장(前部將)을 맡아 정운·권준·신호와 함께 선봉에서 곧바로 돌진했습니다.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鄭運) ∙ 귀선돌격장 군관 이언량(李彦良) ∙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權俊) ∙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申浩) 등이 먼저 곧바로 돌진하여 선봉 왜 대선 네 척을 깨부수니..." (난중일기 1592년 9월 1일)
이날 정운 장군이 전사했습니다(「이순신의 지음, 정운 장군」 편 참고). 이순신(李純信)은 정운 장군이 전사하던 바로 그 격전의 선봉에 함께 있었던 사람입니다.
포상 명단에서 홀로 빠진 이순신(李純信)
부산포대첩 직후인 1592년 9월 11일,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 장계를 올립니다. 이 장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정운 장군의 전사를 애도한 데 이어, 이순신(李純信)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변방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써 네번이나 적을 무찌를 적에 반드시 앞장을 서서 분격하였으며, 당항포 접전을 할 때에는 왜장을 쏘아 목을 벤 그 공로가 월등하다. 뿐만아니라, 사살하는데만 전력하고 목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들어 별도로 장계하였는데, 이번 포상의 글월 중에 이순신(李純信)의 이름만 들어 있지 않으니…" (장계, 1592년 9월 11일)
이어서 이 장계에는 「이순신의 사람들」 권준 편에서 이미 소개해 드린 그 유명한 문장이 나옵니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權俊) ∙ 이순신(李純信) ∙ 어영담(魚泳潭) ∙ 배흥립(裵興立) ∙ 정운(鄭運)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권준(權俊)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되었으나, 오직 이순신(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기를 엎드려 기다립니다." (장계, 1592년 9월 11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한 다섯 장수 가운데 권준·어영담·배흥립·정운은 모두 승진했는데, 이순신(李純信)만 이름이 빠졌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사실을 조정에 직접 지적하고, 그를 위해 별도로 포상을 청한 것입니다.
부모도 뵙지 못하고
전쟁 중에도 이순신(李純信)은 방답첨사·순천부사·광양현감 등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진영에 자주 드나들며 술과 음식을 나누고, 활을 쏘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593년 3월 8일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나니, 광양현감(어영담) ∙ 낙안군수 ∙ 방답첨사(이순신)가 왔다. 방답첨사와 광양현감은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오고, 우수사(이억기)도 오고..." (난중일기 1593년 3월 8일)
그러나 늘 웃으며 만난 것만은 아닙니다. 같은 해 8월 2일, 이순신(李純信)은 부모를 뵈러 가겠다고 간절히 청했지만, 다른 장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물녘에 우수사(이억기)가 배에 와서 하는 말이, '방답첨사(이순신)가 부모를 뵈러 가겠다'고 간절히 청하나, 여러 장수들이 보낼 수 없다고 하므로 이에 답하였다." (난중일기 1593년 8월 2일)
전쟁이 앗아간 것은 목숨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를 뵈러 가는 며칠의 말미조차, 전선을 지키는 장수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충청수사로, 그리고 시련
1594년 4월 18일, 이순신(李純信)은 충청수사로 승진해 다시 이순신 장군의 진영을 찾아옵니다.
"충청도 신임 수사(李純信) ∙ 순천부사 및 우수사우후(李廷忠)가 왔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18일)
사흘 뒤인 4월 21일, 그가 맡고 있던 방답첨사 자리를 정식으로 인계하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방답첨사가 충청수사로 되어 중기(重記)를 수정하는 일로 아뢰고 돌아갔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21일)
충청수사가 된 뒤에도 이순신(李純信)은 여전히 자주 등장합니다. 이순신 장군과 장기를 두고, 함께 활을 쏘고,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1595년 3월 16일, 난중일기에는 이런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들어왔다. 그 편에 들으니, 충청수사 입부 이순신(李純信)이 군량미 이백 여 섬을 조도어사 강첨(姜簽)에게 발각되어 그 때문에 잡혀 심문당했다고 했다." (난중일기 1595년 3월 16일)
바로 이날, 순천부사에서 파직되었던 권준 장군이 본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집니다(「이순신의 사람들」 권준 편 참고). 같은 날, 한 사람은 시련에서 돌아오고 한 사람은 시련에 빠지는 소식이 나란히 전해진 셈입니다. 이순신(李純信)이 실제로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는 난중일기에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날 기록에 "새로 부임한 충청수사 이계훈(李繼勛)"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점에는 이미 충청수사 자리에서 물러난 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그날, 술병을 들고 온 사람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오판으로 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4월 1일, 마침내 옥문을 나옵니다. 그날의 난중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 ∙ 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 ∙ 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1일)
지사 윤자신이 찾아와 위로하고, 술을 들고 다시 찾아오고, 여러 사람이 사람을 보내 문안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순신(李純信)이 있었습니다.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鄭琢) ∙ 판서 심희수(沈禧壽) ∙ 우의정 김명원(金命元) ∙ 참판 이정형(李廷馨) ∙ 대사헌 노직(盧稷) ∙ 동지 최원(崔遠) ∙ 동지 곽영(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1일)
영의정과 판서, 대사헌 같은 조정 대신들은 모두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李純信)만은 직접, 그것도 술병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백의종군을 앞둔, 가장 참담했을 그 하루에 말입니다.
경상우수사로 다시 만나다
정유재란의 참화 속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1597년 12월 1일, 이순신(李純信)은 경상우수사가 되어 이순신 장군의 진영을 찾아옵니다.
"맑고 따뜻했다. 아침에 경상수사 입부 이순신(李純信)이 진에 왔다. 나는 배가 아파서 저녁나절에야 수사를 보고, 그와 종일 이야기하며 대책을 의논했다." (난중일기 1597년 12월 1일)
명량대첩(9월 16일)이 끝나고 두 달 남짓 지난 시점입니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이순신 장군은 저녁 늦게까지 그와 마주 앉아 전략을 의논했습니다. 방답첨사로 처음 만난 지 6년, 이순신(李純信)은 이제 이순신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사(水使)가 되어 전쟁의 마지막 국면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노량, 마지막 전투
난중일기는 1598년 10월 7일(양력 11월 5일)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은 그로부터 두 주 남짓 뒤인 11월 19일의 일이라, 이 전투에서 이순신(李純信)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난중일기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순신(李純信)이 당시 경상우수사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1604년(선조 37), 이순신(李純信)은 임진왜란의 공로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됩니다. 권준 장군과 같은 등급입니다. 1607년에는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포도대장, 충청수사, 수원부사, 경상부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전라방어사, 함경도병사, 전라병마절도사,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1611년(광해군 3), 이순신(李純信)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있으며, 1987년 광명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은 장보고급 잠수함의 제 7번함을 이순신(李純信)의 이름을 따서 '이순신함 (SS-68)'로 명명하였습니다.
글을 마치며
정운 장군이 '지음'이었고, 이억기 장군이 '가장 가까웠던 동료'였고, 정걸 장군이 '멘토'였고, 권준 장군이 '친한 벗'이었다면, 저는 이순신(李純信)을 이순신 장군이 가장 어려울 때 곁을 지켜주었던 장군으로 칭하고 싶습니다. 그는 백의종군 첫 날에도, 노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에도,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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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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