㉕ 어란포·벽파진해전, 명량대첩 전야의 기록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다시피 한 뒤, 이순신 장군은 배설이 숨겨둔 판옥선 12척을 넘겨받아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과정은 이미 다룬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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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건된 함대가 처음으로 왜적과 맞붙은 전투가 어란포해전이고, 그 뒤 함대가 보름 넘게 머물며 명량대첩을 준비한 곳이 벽파진입니다. 그런데 이 여정은 전투에 앞서, 이순신 장군이 먼저 자신의 몸과 싸우는 일로 시작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다
정유년(1597) 8월 21일 새벽, 이순신 장군은 심한 급체 증세로 쓰러집니다.
"날이 채 새기 전에 도와리가 일어나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더니 한참동안 인사불성이 되었다. 하마트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을 앉아서 새웠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21일)
참고로, 도와리는 순우리말로 음식이 체하여 토하고 설사하는 급성 위장병을 말하는데, 찬물을 마시거나 몹시 화가 난 경우, 뱃멀미나 차멀미로 위가 손상되어 일어나거나, 한의학에서는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면 기(氣)가 위로 치밀어 올라 위장 기능이 상하여 일어난다고도 합니다.
다음 날에는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고, 그다음 날에는 배 위에서 지내는 것조차 힘들어 뭍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런 몸으로 8월 24일, 이순신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어란 앞바다에 이릅니다.
텅 빈 마을, 그리고 헛소문
어란에 도착해 보니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정유재란으로 이미 백성들이 피난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군중에 소란이 일어납니다.
"그대로 어란포에서 머물렀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당포의 포작이 놓아둔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들어 왔다, 적이 쳐들어 왔다'고 헛소문을 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25일)
칠천량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함대에서, 거짓 경보 하나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순신 장군은 알고 있었습니다. 군기를 지체 없이 바로 세운 것입니다.
겁먹은 배설
이틀 뒤, 경상우수사 배설이 찾아왔습니다. 배설은 이순신 장군에게 12척의 배를 넘긴 바로 그 장수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게 아니오!'라고 말하였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27일)
짧은 한마디였지만, 배설을 향한 이순신 장군의 의심과 질책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 불안한 관계는 다음 날 실전에서 곧바로 시험대에 오릅니다.
적선 여덟 척, 그리고 물러서지 않은 대장선
8월 28일 새벽, 왜선 여덟 척이 예고 없이 나타납니다.
"새벽 여섯 시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 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적선이 멀리 도망하기에 더 뒤쫓지 않았다. 뒤따르는 배는 쉰여 척이라고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28일)
칠천량의 기억이 생생한 함대는 겁을 먹었고, 배설은 도망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며 적선을 맞받아친 결과, 왜선은 물러갔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날 저녁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습니다.
규모로 보면 큰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칠천량의 패배로 사기가 완전히 무너진 함대, 그리고 그 함대를 이끌어야 할 장수조차 도망치려 하는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 한 사람의 흔들리지 않는 태도가 함대 전체를 다시 붙잡아 세운 싸움이었습니다.
벽파진에 진을 치다
다음 날인 8월 29일, 함대는 벽파진(진도군 고군면)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명량대첩이 벌어지기까지,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보름 넘게 머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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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하단부터 위쪽으로 어란포, 벽파진, 임하도를 표시하였다 |
"아침에 건너왔다. 벽파진에 대었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29일)
다음 날에도 함대는 그대로 머물며 정탐꾼을 사방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날 저녁,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저녁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소지를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30일)
이순신 장군은 배설의 속뜻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뭍으로 내려가 몸조리하고 오라는 공문을 써 보냈습니다. 붙잡지 않은 것입니다.
경상수사 배설, 끝내 도망치다
그리고 사흘 뒤, 이순신 장군의 짐작은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2일)
단 한 문장입니다. 어란포에서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게 아니오!"라고 다그쳤던 그 장수가, 결국 자신의 수영조차 지키지 못하고 달아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흐레 만의 접전, 그리고 한밤의 포성
벽파진에서 함대는 며칠간 거센 바람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9월 7일, 마침내 적이 움직입니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쉰다섯 척 가운데 열세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 고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7일)
오후 네 시쯤, 적선 열세 척이 곧장 다가왔습니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서 공격하여 급히 나아가니,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쫓아 먼 바다에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흘러 항해할 수가 없어 복병선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더 쫓아가지 않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7일)
이순신 장군은 이날 밤 야습을 예감했습니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오늘 밤에는 반드시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다"며 미리 대비를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집니다.
"밤 열 시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으로 공격해 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진동했다. 그랬더니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났다 하면서 포를 쏘아댔다. 밤 한 시가 되니 아주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7일)
겁먹은 함대 속에서, 대장선이 홀로 앞으로 나가 포를 쏘아 적을 물리친 밤이었습니다.
인사권 없는 통제사, 배설 대신 온 김억추
배설이 사라진 자리는 우수사 김억추가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그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일기에 남깁니다.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감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데도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8일)
경상수사는 도망갔고, 전라우수사는 대장 재목이 못 된다고 스스로 적었습니다. 명량대첩을 코앞에 둔 함대의 실상이 이러했습니다.
중양절, 그리고 벽파진을 흔든 소문
9월 9일은 중양절이었습니다. 상중이었던 이순신 장군은 자신은 절제했지만, 병사들에게는 제주에서 온 소 다섯 마리를 잡아 먹였습니다. 그날 저녁에도 적선 두 척이 정탐하러 왔다가 쫓겨갔습니다.
그리고 닷새 뒤, 벽파정 맞은편에서 연기가 오릅니다. 정탐을 나갔던 임준영이 급히 돌아와 전한 소식이었습니다.
"적선 이백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4일)
임준영은 또 하나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왜적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난 김중걸이라는 사람이 전한 말이었습니다. 왜군들이 모여 "조선 수군 열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 하겠다"며, 조선 수군을 모조리 죽인 뒤 한강까지 올라가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9월 7일 밤 야습을 물리친 데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라며, 우수영에 남은 피난민들을 뭍으로 올려보내라는 전령을 보냈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다음 날인 9월 15일, 이순신 장군은 함대를 우수영 앞바다로 옮깁니다. 벽파진 뒤에 있는 울돌목(명량)을 등지고는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이렇게 약속합니다.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너그럽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5일)
죽을 고비를 넘기고, 헛소문을 다스리고, 겁먹은 배설을 다그치고, 물러서지 않는 대장선으로 함대를 붙잡아 세우고, 결국 도망친 경상수사와 재목이 못 되는 우수사만 남은 함대. 그 함대를 이끌고 이순신 장군은 다음 날, 열 배가 넘는 적과 맞섭니다. 그 하루의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 관련 글 바로가기 ⑥ 명량대첩,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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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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