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장부가

현충사 화장실에서 마주친 두 번째 감동

저는 2015년 여름휴가 기간에 현충사를 방문하여 우연히 화장실에서 감동의 순간을 경험하고 그것을 아래 글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 ④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죽게 되면 죽을 것이다

그날 화장실 액자에 걸린 글 중에서 저에게 감동을 준 것은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에게 감동을 준 두 번째 글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장부가

"대장부로 세상에 나와, 나라에서 써 주면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 것이요,
써 주지 않으면 야인이 되어 밭갈이하면서 살리라."

서른두 살,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내

장부가는 이순신 장군이 1576년(선조 9년) 2월에 한 다짐입니다. 서른두 살, 늦은 나이로 식년무과에 겨우 급제한 직후였습니다. 아직 아무 관직도 받지 못한 채, 발령을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장군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실려 있고, 훗날 《이충무공전서》에 그대로 수록되었습니다. 한문 원문은 이렇습니다.

丈夫出世(장부출세)

用則效死以忠(용즉효사이충)
不用則耕野足矣(불용즉경야족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다짐은 훗날 보직이나 승진을 위해 권문세가에 드나들며 아첨하거나 영화를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기 훨씬 전,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사내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곧 그의 삶인 사내

이순신 장군의 어록 중에는 다른 문헌에서 빌려온 말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명량대첩 전날 외쳤던 "필사즉생 필생즉사"는, 장군 스스로 난중일기에 "병법에 이르기를"이라 밝혔듯 《오자병법》에서 빌려온 문장입니다.

하지만 이 "장부출세"는 다릅니다. 제가 찾을 수 있는 문헌 중에는, 이 말이 다른 병법서나 경전을 인용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장부가의 문장에 현충사 화장실에서 두 번째 감동을 받았습니다.
서른두 살 나이에 어렵게 무과 급제를 하고, 이제 그동안의 고생을 잊고 못다 한 인생의 행복을 꿈꾸는 생각을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죽음으로 충성을 다하든지 아니면 밭을 갈며 살리라 다짐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이 말은 곧 그의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밭을 가는 것도 부끄럽지 않다

이순신은 이 다짐을 지켰습니다.
훈련원 봉사 시절,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려 했을 때도 권문세가에 기대지 않겠다며 거절했습니다. 같은 시기, 인사 실무를 쥐고 있던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의 친구를 부당하게 추천하라 지시했을 때도 원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서익은 무관들의 추천과 전보에 직접 관여하는 자리였으니,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곧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막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8개월 만에 충청도로 좌천되었습니다.

써 주지 않으면 밭을 갈겠다던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고, 세상이 말하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에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한 해 전, 전라좌수사로 7단계 특진하지 못하였다면 그의 최고 직책은 고작 정읍 현감 정도였을 것입니다.

내가 장부가에 감동받은 이유

직장 생활을 30년 정도 해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매일 부딪히는 경험이 하나도 전과 동일한 것은 없습니다. 매번 다른 상황에 부딪히면서 자신이 세운 하나의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원칙이 정말 그렇게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고민하면서, 내가 너무 외골수처럼 사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순간이 수없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그것으로 인해 손해 보는 인생을 살아도 끝까지 그것을 지킨 사람의 가슴 속에는 남들이 모르는 별빛이 빛나게 됩니다.

저는 그런 별빛을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사내를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장부가를 현충사 화장실 액자에서 보고 제가 감동받은 이유는, 가슴 속에 그런 별빛이 빛나는 사내를 제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⑥ 몸철학 관점에서 본 이순신 장군의 삶과 죽음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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