㉓ 제2차 당항포해전, 휴전 회담 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싸움

명나라와 왜가 휴전을 논의하던 1593년 3월부터 1596년 9월까지, 한산도의 이순신 장군은 둔전을 일구고 판옥선을 건조하며 다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23전 23승에 꼽히는 전투는 제2차 당항포해전(1594년 3월) 하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장문포해전(1594년 9월)이 그 뒤에 있기는 하였으나, 이 해전은 싸움이라 할 만한 내용이 없어 저는 23전 23승에서 제외했습니다.

장문포해전을 왜 23전 23승에서 제외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설명할 예정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3년 6개월의 휴전 회담 기간 중, 유일하게 '싸움다운 싸움'이라 부를 수 있는 제2차 당항포해전을 소개하려 합니다.

첩보, 그리고 출동

갑오년(1594) 3월 3일 저녁, 벽방(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과 고성군 거류면에 걸쳐 있는 ‘벽방산(碧芳山)’을 의미)의 척후장 제한국에게서 다급한 보고가 들어옵니다.

"왜선 여섯 척이 오리량·당항포 등지에 정박해 있다." (난중일기 갑오년 3월 3일)

이순신 장군은 곧바로 배를 소집하라는 전령을 내리고, 정예선 서른 척을 우조방장 어영담에게 맡겨 적을 무찌르도록 했습니다. 그날 밤, 함대는 곧장 출항했습니다.

사흘간의 추격전

3월 4일 새벽, 조선 수군은 근해로 도망가는 왜선을 뒤쫓았습니다. 진해 앞바다에서 여섯 척을, 돝섬(저도)에서 두 척을 불태웠습니다. 같은 날 소소강에 왜선 열네 척이 더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조방장과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그쪽을 맡겼습니다.

육지 깊숙히 위치한 당항포 포구
육지 깊숙히 위치한 당항포 포구

당항포 포구 안쪽에는 아직 더 많은 배가 남아 있었습니다. 3월 5일, 우조방장 어영담의 긴급보고입니다.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틈타서 도망했으므로 빈 배 열일곱 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난중일기 갑오년 3월 5일)

그리고 3월 6일 새벽, 포구 수색을 마친 최종 결과가 들어옵니다.

"당항포 왜선 스물한 척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긴급보고를 했다." (난중일기 갑오년 3월 6일)

3월 5일의 '열일곱 척'은 당항포 포구를 다 뒤지기 전에 나온 잠정 집계였고, 3월 6일의 '스물한 척'은 포구 수색을 마저 끝낸 뒤 나온 최종 집계입니다. 즉 스물한 척 안에 전날의 열일곱 척이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두 숫자를 따로 더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 앞서 근해에서 불태운 여덟 척(진해 앞바다 여섯 척, 돝섬 두 척)만 더하면, 사흘간 조선 수군이 난중일기에 남긴 전과는 왜선 스물아홉 척입니다. 이 전투를 다룬 다른 기록에서는 흔히 서른한 척으로 소개되는데, 고성 어선포 등지에서 불탄 배 몇 척이 난중일기 원문에는 따로 나오지 않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어느 쪽이든, 사흘에 걸친 추격 끝에 왜선 서른 척 안팎이 남김없이 불탔습니다.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승리 직후 날아온 명나라의 패문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남해현감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옵니다.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군사 두 명을 보낸다." (난중일기 갑오년 3월 6일)

패문(명령서)을 열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명나라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 (난중일기 갑오년 3월 6일)

당시 명나라와 일본은 휴전 협상을 진행 중이었고, 그 협상을 관리하던 명나라 관원 담종인이 조선 수군에게 직접 "싸움을 멈추라"고 통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멈추라"는 패문(명령서)을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애써 이긴 싸움을 눈앞에서 멈춰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하다." (난중일기 갑오년 3월 6일)

패문과 함께 장군을 덮친 역병

다음 날인 3월 7일, 이순신 장군은 몸이 더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꼼짝하기조차 어렵다." (난중일기 갑오년 3월 7일)

그런데도 그는 담종인에게 보낼 답신을 직접 챙겼습니다.

아랫사람에게 초안을 맡겼더니 "지어 놓은 글이 꼴이 아니었"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손의갑을 시켜 쓴 글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앉아 직접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그것을 옮겨 쓰게 해서 보냈습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에서, 부하들이 써온 글 두 편을 모두 물리고 자신이 직접 붓을 든 것입니다. 명나라를 상대하는 외교 문서 하나에도 책임을 다했던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의 싸움을 멈추라는 명령서를 받은 그날부터 3주간 몸이 심하게 아팠습니다. 당시 계갑대기근과 역병이 조선 수군 진영을 강타했기에, 장군 역시 이 역병에 걸려 거의 죽다 살아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어영담 장군도 이 시기에 역병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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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회담이 진행되던 3년 6개월 동안, 조선 수군은 1594년에 제2차 당항포해전과 장문포해전에서 출동하였고 1595년과 1596년에는 출동한 기록이 없습니다.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던 중 명나라의 명령으로 싸움을 멈춰야 했던 현실, 그리고 기근과 역병으로 수많은 군사가 목숨을 잃은 사정을 감안하면, 그 후 출동이 멈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음에도 명나라의 한마디에 싸움을 멈추어야 했던 장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역병이 명나라의 패문(명령서)이 도착한 바로 그날부터 장군의 몸을 덮쳤다는 사실은, 과연 단순한 우연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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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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