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와키자카 야스하루 이야기

저는 묻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적에게조차 존경을 받았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존경과 숭배를 받고있는 인물을 당신은 아십니까?

제 짧은 지식으로 저는 이순신 장군 이외에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에게 왜군은 실로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마지막 전투인 노량대첩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간 벌어진 이 전쟁에서 상대편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제가 소개하는 왜군 장군은 적이었던 이순신 장군 앞에서 자신의 참담한 패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 인물이었으니, 저는 그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소개하려 합니다. 한편 제 마음 한 구석에는 패배 앞에서도 정직했던 그의 태도를 우리도 배워, 우리도 적에게조차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1600명으로 5만 조선군을 짓밟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전국시대 최고 권력자로 만든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일곱 장수 중 하나로서, '칠본창(七本槍)'이라 불리며 히데요시의 두터운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야스하루

그는 공을 인정받아 아와지섬(淡路島)이라는 섬 지역의 영주가 되면서 해상 수송과 선박 관리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 인연으로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의 해상 수송과 보급선 확보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양을 되찾기 위해 올라오는 조선군을 막으려 와키자카는 다시 본래 장기인 육군 지휘관으로 현장에 투입됩니다.
이때 벌어진 것이 바로 용인 전투였습니다.
그는 불과 1,600여 명의 적은 병력으로, 북상하던 5만 명의 조선 삼도근왕군을 기습하여 궤멸시키는 충격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용인 전투는 조선군에게 치욕과 공포를 주며 그를 왜군의 대표적인 명장 반열에 올렸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일본 수군이 연패를 거듭하자, 당황한 히데요시가 와키자카에게 수군 지휘관 겸임 명령을 내려 한산도 전선으로 급히 투입한 것입니다.
그는 73척의 왜선을 가지고 한산도에서 거북선을 포함한 58척의 조선 수군과 맞붙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은 이순신 장군이 펼친 거북선을 이용한 학익진 진법 앞에서 궤멸적인 패배로 이어집니다. 73척의 배 중에서 오직 14척만 도망쳤고 47척이 분파되고 12척은 나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가까스로 무인도에 피신하여 열흘 남짓 그곳에서 미역을 먹으며 숨어지내다 탈출합니다.

용인 전투보다 가치있는 패배의 기록

한산도 대첩에서의 패배와 무인도에서 주린 배를 채워준 미역의 기억은 와키자카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로 남았습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일본으로 돌아온 와키자카는 자신이 어떻게 패배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사실 그대로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패배를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일본 무사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무공은 부풀리고 패배는 애써 감추거나 축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와키자카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얼마나 많은 배를 잃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도망쳤는지를 축소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남겼습니다. 패장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저는 이 태도가 역사적으로 볼 때, 용인 전투에서의 승리보다 오히려 더 값진 결과를 일본 후손들에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와키자카와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음력 7월 8일이 되면 뼈저린 패배를 잊지 않고 자만심을 경계하기 위해 집안 식구들이 모여 미역만 먹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패배를 인정하고 그 패배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와키자카의 정신은, 일본이 최강의 해군력을 가졌던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집니다.

일본 해군이 매년 충렬사를 찾아 제사를 지낸 이유

일제강점기 당시 진해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은 매년 공식 예산까지 편성하여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통영 충렬사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참배하는 연례행사를 가졌습니다. 자신들을 패배시켰던 '적장'이었고 자신들이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적장을 바다의 군신(軍神)이자 자신들의 스승으로 인정하고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 부산일보 - '일본인과 이순신', '적장' 충무공은 日 해군의 軍神이었다

이러한 존경은 단순한 의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 내에서는 이순신이 하나의 학문적 연구 대상이자 신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의 전쟁사 연구자 사토 데쓰타로는 1927년 저서에서 이순신을 두고 "인격이나 장수의 그릇, 모든 면에서 흠잡기 어려운 명장"이라 평하며 영국의 넬슨 제독조차 이순신에 견주면 부족하다고 찬탄했습니다.
일본 해군 교관이었던 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역시 이순신의 전략을 연구해 저술로 남겼고, 이는 훗날 일본 해군 장교들 사이에 이순신의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적장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전략을 연구하며 배우려 노력했던 일본 해군은 당시 무적이었던 러시아 함대를 무찌르고 아시아 최강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됩니다. 

일본은 지금도 이순신 장군을 대부분의 일본 주류 교과서에 수록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의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적장인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를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배우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와키자카와 일본인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로서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적에게조차 배우려고 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또한 저를 돌아보며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나는 얼마나 배우려고 했는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 다음글 바로가기 ⑩ “이순신 장군 5대 해전”을 알아보자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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