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명량대첩,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
임진왜란의 초반 열세를 뒤집은 전투가 '한산도대첩'이었다면, 정유재란의 패색을 승전으로 바꾼 전투는 '명량대첩'입니다. 두 대첩이 모두 위대한 것은 분명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한산도대첩보다 명량대첩을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판옥선 52척과 거북선 3척을 거느리고 사기가 오른 군사들과 함께 싸운 한산도대첩도 대단하지만, 명량대첩은 절망과 고독 속에서 압도적인 적을 물리친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명량대첩 전날에 있었던 일
이미 배설이란 장군은 9월 2일 도망을 친 상태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의 참패가 두려움으로 남아 있는 반면, 일본은 압도적인 전력과 칠천량의 승전으로 사기가 최고조인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이 벌어진 전날, 수군의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습니다. 적은 수의 아군으로 울돌목(명량)을 등지고 적을 맞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수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난중일기는 전합니다.
"병법에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임하도에서 왜선을 가두고 싸우다
1597년 9월 16일(음력) 명량대첩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133척의 적선이 몰려올 때, 이를 막아낸 곳은 진도대교 밑의 울돌목(명량)이 아니였습니다. 저는 실제 명량대첩이 있던 곳은 진도대교 밑의 울돌목(명량)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300미터나 되는 넓은 바다와 거센 물살은 노를 젓는 무동력선 13척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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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하도. 지금은 다리가 보이는 곳에 판옥선 7척으로 바다를 막았다. |
대신 임하도(현재 해남군 문내면 위치)는 육지 사이의 바다가 50미터 정도의 폭으로 판옥선 7척을 연결하면 바다를 틀어 막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은 임하도 앞 바다를 틀어막고 나머지 6척으로 임하도를 뒤로 돌아와 임하도 앞 바다에 왜선들을 가두어 두고 싸우신 것입니다. 실제 명량해전 당일에 기록한 난중일기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싸움에 나선 배는 하기와 같이 6척이 전부입니다.
(난중일기에 나온 명량대첩 당일 전투에 나선 6척의 배 -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대장선, 우수사 김억추의 배, 김응함의 배, 안위의 배, 송여종의 배, 정응두의 배 총 6척)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은 명량대첩이 시작된 초반 2-3시간 동안 홀로 나가 싸웠습니다. 나머지 5척은 모두 대장선의 뒤에 한참 떨어진 곳에서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대장선이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나머지 5척도 결국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임하도에서 명량대첩 전투가 어떻게 치루어 진 것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와 같이 그림을 추가합니다. 한산도대첩에서 학익진으로 왜선들을 가두고 이겼듯이 명량대첩에서도 왜선들을 가두고 함포와 물살을 이용해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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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하도에서 명량대첩 전투 상황도 |
임하도에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다
저는 과거 임하도 앞바다에 직접 가서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도 저는 임하도 앞바다에서 나의 억울함과 나의 고독과 나의 어려움은 도대체 이순신 장군의 그것과 비교해서 얼마나 작은 것이가? 물어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순신 장군과 저를 비교한다는 것이 너무 우습기도 하지만 그런 비교가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명량대첩을 승리로 끝내고 이날 난중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는 실로 천행이다“
불가능한 전투에서 나라를 구하고 이렇게 담백하고 짧은 구절로 일기를 마치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 [이순신 마지막 2년] ⑦ 통곡,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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