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㉔ 장문포해전, 23전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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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흔히 "23전 23승 무패의 장군"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그 목록을 들여다보면, 1594년 가을에 벌어진 장문포해전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 해전은 23전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것일까요? 이번 글에서는 장문포해전의 내막을 알아보겠습니다. 곽재우와 김덕령, 바다로 오다 9월 26일, 뜻밖의 인물들이 이순신 장군의 진영에 도착합니다. "새벽에 곽재우, 김덕령 등이 견내량에 이르렀으므로 박춘양을 보내어 건너온 까닭을 물었더니, 수군과 합세할 일로 원수(권율)가 전령하였다고 하였다." (난중일기 갑오년 9월 26일) 의병장 곽재우와 김덕령이 육군을 이끌고 수군과 합세하러 온 것입니다. 다음 날 이들은 정식으로 약속하고 각자 원하는 곳으로 갈라졌습니다. 수륙합동작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장문포해전의 시작 9월 29일, 함대는 장문포로 향합니다. 현재 장문포구 위치 "출항하여 장문포 앞바다로 마구 쳐들어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누각을 높이 양쪽 봉우리에는 진지를 쌓고서 항전하러 나오지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난중일기 갑오년 9월 29일) 왜적은 산 위에 진지를 쌓아두고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조선 수군이 태운 것은 사람이 없는 빈 배 두 척뿐이었습니다. 10월 1일, 이순신 장군은 충청수사와 함께 영등포로 들어갔지만, 이번에도 왜적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흉악한 적들은 바닷가에 배를 대어 놓고 한 놈도 나와서 항전하지 않았다." (난중일기 갑오년 10월 1일) 그런데 그날 저녁, 배를 뭍에 매려던 사도 2호선에 왜적의 작은 배가 다가와 불을 던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자칫했으면, 조선 수군의 배가 불에 탈 뻔했습니다. "불은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매우 분통하다." (난중일기 갑오년 10월 1일) 10월 2일에는 선봉선 서른 척을 보내 적정만 살피고 돌아왔습...

⑬ 23전 23승, 그 숫자의 진실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23전 23승 무패의 장군이라 부릅니다. 저도 이 표현을 여러 번 썼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 23전은 어디서 왔을까요? 아무도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이 표현을 썼습니다. 2년간 방영되며 널리 퍼졌습니다. 2005년에는 KTV가 '이순신, 23전 23승 불패의 조건'이라는 특집을 방영했습니다. 2014년에는 같은 제목의 책이 나왔습니다. 유명 강사의 강의에도 이 숫자가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23전이 정확히 어느 해전들인지, 밝힌 사람이 없습니다. 학계는 다른 숫자를 말한다 해군사관학교 제장명 교수는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을 조사했습니다. 2007년 발표는 43전 38승 5무였습니다. 2012년, 그는 이 숫자를 45전 40승 5무로 고쳤습니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임원빈 교수도 2012년 같은 말을 했습니다. 23전 23승은 근거가 없다고. 내가 세어본 23전 그래서 저는 직접 세어보았습니다. 이름 붙은 해전을 날짜순으로 나열하면 25개가 나옵니다. 여기서 칠천량을 뺐습니다. 이건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이 지휘한 해전입니다.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입니다. 장문포도 뺐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주도한 해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다할 교전 자체가 없었습니다. 25에서 2를 빼면 23이 남습니다. 23전 23승이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학계의 말을 저도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모르는 해전이 더 있을 수 있고, 그것이 43이든 45든 상관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이 많은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23전 전체 목록 아래는 제가 조사한 23전 전체 목록입니다. 어떤 해전은 난중일기에 언급이 되어있고 어떤 해전은 조정에 보고한 장계로만 전해집니다. 이 목록을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앞으로 이순신 연구를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순서 해전명 ...